방송인의 서재는 탤런트, 성우, 코미디언 등 방송실연자의 다양한 감정과 영감, 창의력에 도움이 되는 양서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소설, 산문, 시, 인문학서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이 방송인 여러분에게 반짝이는 뮤즈가 되어 주길 기대합니다.
“동틀 때부터 날은 춥고 어둑했다. 지독히도 춥고 어둑했다. 사내는 유콘 지역의 본길에서 벗어나 높다란 둑을 올랐다. 동쪽의 가문비나무 숲으로 이어진 둑길은 인적이 드물어 선명치 않았다. 가파른 둑이었다. 그는 정상에 올라 잠시 숨을 멈추며 숨을 골랐다. 시계를 보기위해서라는 게 스스로에게 내세운 명분이었다. 9시였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지만, 해가 나타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날은 맑아도 음산한 기운 같은 게 만물을 뒤덮고 있었다. 날을 어둡게 만드는 그 묘한 음울함은 해가 없기 때문이었다.”
- 본문 중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싶은 방송인에게
<불을 지피다>는 단편이다. 영하 50도가 넘는 혹한의 계절에 언 유콘강을 건너는 한 남자가 모닥불을 지피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다. 줄거리는 한 줄로 요약될 정도로 짧고 구성은 한 남자와 추위, 젖은 성냥, 개 한 마리로 요약될 정도로 간결하지만 읽는 내내 춥고 몸서리처지고 고통스러운 감각이 고스라니 전달된다. 잭런던 특유의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문체는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의 몸과 사고방식이 작동하는 방식을 영상보다 더 치열한 감각으로 치환해 보여준다.
40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잭런던은 짧은 생이 무색하게 그의 삶은 거칠고 험했다. 그가 소설에 투과하는 인물의 원형과 배경은 마치 <불을 지피다>의 ‘불’처럼 원초적이고 위태롭고 강인하다. 잭런던이 국내에서 크게 사랑 받는 작가는 아니지만, 그의 글은 반드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특히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각과 감정을 묘사하는 잭런던의 방식은 거침이 없고 직설적이지만, 마치 그 직설조차 은유의 어항 속에서 펼쳐지는 세상인 듯 겹과 결이 깊다. 거의 영상으로 타인의 감각과 감정을 경험하는 요즘, 문장으로 만나는 타인의 경험은 또 다른 깊이와 넓이를 보여줄 것이다.
잭 런던 지음 | 이한중 역 | 한겨례출판 | 2012년
“비파라는 과일의 모습과 맛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형용사는 ‘친절하다’다. 그것은 고즈넉한 모양과 절도 있는 달콤함, 오렌지색은 절대 아닌 부드러운 색감과 술술 벗겨지는 껍질의 순순함, 과즙이 충분하지만 (껍질을 벗겼을 때 드러나는 속살의 표면은 맛나고 달콤한 물을 듬뿍 머금고 빛난다) 튀거나 넘쳐흐르지 않는 수분, 차분한 기척...... 등의 인상에서 오는 것이지만, 아마도 동요의 영향이 더 클 것이라 생각한다. ”
- 본문 중에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싶은 방송인에게
언제부터인가 이른바 먹방에 많은 이들이 탐닉하기 시작했다. 바사삭 소리를 내며 입에서 부서지는 치킨, 보기만 해도 침이 넘어가는 새빨간 떡볶이, 철판 위에서 기름 자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삼겹살 등. 먹방이 주요 콘텐츠가 되면서 단순히 눈을 크게 뜨고 감동한 표정으로 ‘맛’을 증명하는 대사는 이제 아무 감흥도 주지 못한다.
음식이 입에 처음 닿을 때 나는 소리, 그것을 씹을 때 마치 보는 사람이 씹는 듯 생생하게 전달되는 먹는 소리, 먹는 사람의 감동어린 표정과 눈빛, 식도로 넘길 때의 쾌감 등이 세분화되어 정교하게 애를 태운 뒤 가장 절정의 순간에 극단적으로 전달되어야 시청자는 만족한다.
그렇게 본다면 <부드러운 양상추>는 요즘 먹방과 먼 대척점에 있다. <냉정과 열정 사이>, <반짝반짝 빛나는> 등으로 이미 세계적으로 넓은 독자층을 거느린 에쿠니 가오리는 특유의 섬세하고 투명한 언어로 식재료와 음식을 단정하게 다룬다. 외관이 주는 느낌, 음식에 얽힌 경험, 먹을 때 혹은 먹고 난 후의 사유 등이 편안한 언어로 전달된다. 하지만 밋밋할 정도로 단정한 묘사는 그 음식을 떠올리고, 그리워하고, 사색하게 만든다.
저자의 언어와 독자의 사색이 만나는 지점에서 테프론 코팅 프라이팬에 부치지 않은 계란프라이가, 근사한 우무자르개로 자른 우무가, 버터가 듬뿍 들어간 쿠키가 천천히 전달된다. 눈으로 코로 귀로 들어온 그 음식들이 독자의 마음 속 어딘가로 들어와 음식에 얽힌 저마다의 추억과 만나기도 한다. 질리지 않는 음식을 “보고”싶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 김난주 역 | 소담출판사 | 2011년
“의사나 경찰관이 되는 것은 하나의 <진로 결정>이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 선택되는 것이다. 글 쓰는 것 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평생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 신들의 호의를 얻디 못하면(거기에만 매달려 살아가는 자들에게 재앙이 있을진저), 글만 써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비바람을 막아 줄 방 한 칸 없이 떠돌다가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일찌감치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이모든 것을 이해했고 각오도 되어 있었으니까, 불만은 없었다. 그 점에서는 정말 운이 좋았다. 물질적으로 특별히 원하는 것도 없었고 내 앞이 가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겁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원한 것은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를 얻는 것, 그것뿐이었다.”
- 본문 중에서
우연과 개연성을 탐구하는 방송인에게
식상한 표현이지만 폴 오스터를 한 번도 안 읽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읽은 사람은 없다. 그만이 보여주는 매혹적인 우연의 이야기들에 빠지면 그 다음, 그 다음 소설을 찾아 탐닉하게 된다.
그가 보여주는 세계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등장인물의 행보는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으며, 어딘지 모르게 살짝 뒤틀린 서사 어딘가에서 생각지도 못한 ‘우연’이 불쑥 튀어나온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폴 오스터 특유의 재치 넘치는 글, 아니 글이라기보다는 입담에 가까운 스토리로 완급을 조절해가며 이어진다. <달의 궁전>부터 <거대한 괴물>, <4,3,2,1>까지 이어지는 그의 소설은 내내 독자를 사로잡는다. 그의 짓궂은 플롯에 부아가 치밀 때도 있고 웃음이 터질 때도 있으며 조마조마해질 때도 있다. 어느 순간이든 그는 독자에게 매혹적인 방식으로 다음 페이지를 선사한다.
<빵굽는 타자기>는 폴 오스터의 자전적 에세이다. 재능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젊은이가 ‘작가’로 먹고 살기 위해 했던 고민과 일들이 담긴 이 에세이는 그의 소설만큼이나 흥미진진하다.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젊은 시절 폴 오스터의 고민과 방황은 ‘소설인가?’싶을 정도로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특히 그가 살면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는 마치 내가 어제 만나고 온 누군가처럼 익숙하다. 책 뒷부분에는 희곡 3편도 수록되어 있다. 폴 오스터를 이제 막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폴 오스터 지음 | 김석희 역 | 열린책들 | 2002년
글. 박여진
insta @didibydidi email didibydidi@gmail.com ——— 읽고 또 읽고 걷고 또 걷는다. 번역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다양한 책을 읽고 무수한 길을 걷는다. 책에서 만난 새로운 길을 이야기하고, 길에서 만난 새로운 사색을 글로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