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인 코브프라

코미디언
김학래


방앗간 집 아들로 태어나 이공계 대학을 나와 경영대학원을 나온 그는 엉뚱하게도 웃음과 사랑에 빠져 희극인이 되었다. 그렇게 희극인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그는 사업가로 또 다른 인생을 시작했다. 사업은 그의 삶 어느 한 토막을 휘청거리게 할 정도로 혹독했지만 그는 버텼고 견고한 사업체의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인터뷰에서 만난 그는 대한민국방송코미디언협회의 이사장이 되어 있었다. 희극인으로, 사업가로, 코미디언협회 이사장으로 살고 있는 김학래 회원을 만났다.

KoBPRA WEBZINE vol.85 INTERVIEWER 박여진   PHOTO 백홍기
대한민국방송코미디언협회 이사장 취임 축하드립니다. 협회는 어떤 단체입니까?
말 그대로 코미디언을 위한 단체입니다. 강제성이 있는 단체는 아니지만 희극인의 복지나 친목 등을 주요 내용으로 활동하는 곳이지요.


전 엄영수 이사장의 뒤를 이어 협회를 이끌어 가려면 협회의 발전 방향을 다각도로 고민하실 것 같습니다. 구상중인 주요 방향에 관해 알고 싶습니다.
지금으로써는 일자리 창출을 가장 주요한 업무로 보고 있습니다. 요즘 유튜브나 OTT를 통해서도 코미디 콘텐츠가 많이 활용되다보니 정작 티브이나 코미디 무대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희극인들이 설 무대가 좁아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한국콘텐츠진흥원을 통해 후원을 받아 마련하는 무대가 있지만 이 무대를 더 넓혀 다양한 연령대의 희극인이 더 많이 무대에 서도록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기금이 넉넉하지 않아 제한도 많습니다. 그래도 고마운 건, 故송해 선생님 유족과 강호동, 안영미, 김구라 등 회원분들의 기부가 큰 힘이 됩니다. 귀한 기부금에 제 노력을 더해 더 많은 희극인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주도록 힘쓸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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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나 연극 무대에서만 코미디를 선보이던 시절과 말씀처럼 다양한 플랫폼에서 코미디를 선보이는 시절은 많이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소통 방식이 좋아진 점도 있지만 한계도 존재하리라 생각하고요. 이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즘 플랫폼은 자유롭게 제작하고 자율적으로 방송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죠. 저마다 스케줄에 맞춰 카메라 하나만 들고도 방송을 찍을 수 있으니까요. 소재 선택의 폭도 기존의 방송보다는 훨씬 넓고요. 하지만 공중파에 비해 전파 위력은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구독자가 많으면 위력이 생기겠지만 범람하는 유튜브 방송 홍수에서 탄탄하게 구독자 수를 확보한 유튜버는 그리 많지 않아요. 누구나 쉽게 진입할 수 있지만 누구나 쉽게 고지에 오를 수는 없다는 것이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은 진입 자체도 쉽지 않고요.


아내 임미숙 선생님과 함께 유튜브 ‘웃짜 채날’을 운영하고 계시죠?
아들의 도움이 컸지요. 아들이 영화 연기를 전공했는데 연기보다는 연출에 관심이 많던 터라 선뜻 유튜브 제작을 도와주었어요. 아내 임미숙의 이름을 딴 ‘미숙한 부엌’ 시리즈는 아내와 아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진행하다보니 아무래도 친근한 면이 많이 어필 된 것 같아요. 구독자도 꽤 늘었더군요. 지금 24만 명 정도 되니까 아주 많은 편이지요.


얼마 전 개그콘서트가 부활했습니다. 개그 프로그램이 사라져가던 중에 부활한 방송이라 무척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개그 트렌드가 예전과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정치 풍자나 사회 풍자 개그가 거의 사라졌다는 점이고요. 선생님이 생각하기에 가장 많이 달라진 개그 문화는 무엇인가요?
예전에는 웃음이 터지는 부분까지 쌓아 올리는 작업이 꽤 길었어요. 방송 속어로는 ‘니주 깐다’고 하지요. (니주는 원래 세트를 만들 때 다용도로 사용되는 나무 발판을 의미하는 일본말로 방송에서는 복선을 의미하는 용어로 자주 사용되었다.) 복선을 길게 가다가 웃음을 터트렸는데 요즘은 그 과정이 무척 간결해졌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요즘 개그 스타일이 무척 좋아 보이더군요. 전개도 스피디하고 뒤에 그림 하나 걸어두고 배경을 설정하는 심플함도 좋아보였어요.

물론 예전과 많이 달라져서 낯선 부분도 있지만 세대가 변하면 당연히 변해야 하는 부분이라 거부감은 전혀 없어요. 오히려 지금의 후배들이 무척 자랑스럽더군요. 다만, 예전처럼 천천히 쌓아올리는 방식의 코미디를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고 생각해요. 그들을 위한 개그는 그런 개그를 해봤던 연륜 있는 개그맨들이 전문이죠. 요즘 개그 문화를 무척 좋아하지만, 옛 개그맨들이 설 무대도 있었으면 해요. 그래야 다양한 시청자의 니즈를 충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대의 흐름을 억지로 거스를 수는 없지만 희극 무대가 더욱 다양해졌으면 합니다. 그리고 개그 문화의 범주에 들어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방송 제작 여건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처럼 억지스러울 정도로 고된 스케줄도 많이 개선되었고 개그맨에 대한 처우나 제작 환경도 많이 좋아졌고요.


공감합니다. 한국방송실연자권리협회 같은 단체가 생기면서 재방송료도 더욱 체계적으로 관리하게 되었죠.
그 부분은 정말 크게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주먹구구식 계산이 많았지요. 그렇다고 개인이 하나하나 확인하기도 어려웠고요. 그런데 지금은 실연자협회에서 전문가들이 전문 시스템으로 관리하면서 재방송료가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모든 방송인이 이 시스템의 실질적인 도움을 받고 있지요. 이 부분은 정말 긍정적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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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조금 엉뚱한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개그, 정확히 말하면 유머는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즘 AI가 인간의 영역에서 많은 부분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업무 외에도 그림, 글, 음악 등 예술 분야까지 확장하고 있지요. 이 AI가 개그를 할 수 있을까요?
어설프게 흉내는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AI가 ‘유머일번지’에 등장하는 내 모습을 찾아 거기에 현재 내 모습을 입히거나 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고요, 제 개그 데이터를 학습해 제 개그와 비슷한 스타일의 개그를 만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웃음이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허를 찌르면서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즉흥적이고 변칙적인 고도의 작업을, 그것도 정말로 웃긴 유머를 AI가 구사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좀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지금 희극인으로, 사업가로, 코미디언 협회의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여러 가지 모습 중 가장 김학래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코미디언이죠. 저는 코미디언이에요. 사업은 부수적이죠. 코미디는 평생 해 온 일이고 가장 사랑하는 일입니다. 지금이야 나이가 들고 젊은 후배들에게 무대를 넘겨주었지만 제 뿌리는 늘 코미디언입니다.


진지했던 그의 표정에 생기가 돌았다.
그 시절 개그를 들려주던 그의 눈은 아이처럼 빛났고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인터뷰 진행 팀 모두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고 웃음은 반짝이는 에너지가 되어 순식간에 그곳의 공기를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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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어느 정도는 대답을 예상하며 했던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코미디언이 되셨나요? 왜 웃음을 사랑하게 되셨나요?
처음에는 돈을 벌고 싶었어요. 가난한 시절, 방앗간 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늘 배가 고팠어요. 누구나 그러했듯 돈과 음식이 절실한 시절이었죠. 그래서 처음에는 대학 교수가 되려고 했어요. 대학 교수는 부와 명예를 다 가진 직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공과대학의 기계공학과에 입학한 것도 그런 이유였지요. 물론 대학원에서는 전공을 바꾸긴 했지만요. 아무튼 대학생활을 하다가 공부가 좀 지루하게 느껴져 연극부에 들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대학교 오리엔테이션 자리에서 급하게 사회 좀 봐달라는 부탁을 받고 마이크를 잡았는데, 생각 외로 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다들 정신없이 웃고 있더라고요. 그 때부터였어요, 웃음을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 그때 이후 대학교 축제 사회로 초빙되기 시작했어요. 봄 축제 시즌에는 20~30군데를 정신없이 다녔지요. 하루에 오전 오후를 나눠 3~4개의 축제를 갔던 적도 있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예상치도 않게 오리엔테이션 자리에서 마이크를 잡았던 그 순간이 제 운명을 바꾼거죠.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희극인으로써 선생님이 꿈꾸는 미래는 어떤 미래입니까?
몇 해 전 송해 선생님 장례식장에 갔는데 코미디언 동료들이 정말 많이 왔어요. 많은 개그맨 선후배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마지막까지 코미디언으로 빛나는 삶을 살고 싶다. 제가 지금 중국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제 장례식에 짜장면집 사장님들이 많이 오는 것보다는, 코미디언 동료들이 저를 기억하고 추모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살다가 코미디를 만났고 웃음을 사랑하면서 코미디에 뿌리를 내렸으니 마지막 순간까지 코미디언으로 빛나는 삶을 살고 싶어요. 그게 제 꿈입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중간 중간 그가 들려준 개그 일화로 몇 번이나 박장대소했다. 우리가 웃을 때마다 그의 눈은 반짝였고 목소리에는 쾌활한 윤기가 흘렀다. 코미디언 김학래는 코미디를 하는 순간 가장 빛났다. 선후배들에게 그런 무대를 더 많이 만들어 주기 위해, 웃음이 에너지가 되는 순간을 한 번이라도 더 마련해주기 위해 코미디언 협회 이사장으로 쉼 없이 달리는 그의 길이 그의 웃음처럼 환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역시 내내 빛나는 코미디언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