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지 산책 에세이

마음의 이름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촬영지, 화적연에서

박여진 여행 작가, 백홍기 사진 작가

12월.
푸르고 더운 땅에 내내 머물 것 같던 여름이
지구 어딘가로 훌쩍 가버리고
빈집의 주인처럼 찾아온 겨울.
겨울에 찾은 화적연은 무채색이었다.
물과 공기와 바위는 한 번도 뜨거운 계절을 살아본 적 없는 듯
차갑고 적막했다.
크게 숨을 들이켜고 천천히 내뱉었다.
신선하고 찬 공기가 코와 입으로 들어와
폐를 돌아 다시 나갔다.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늘 들어오고 나가는 숨.


오래 전 이 숨에 지독한 공포가 생겼던 적이 있다. 처음 공포를 느낀 것은 십여 년 전이었다. 자다가 갑자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깊게 심호흡도 해보고 가쁘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뱉기도 해보았지만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들이마셔도 몸속의 산소가 빠져나가는 느낌. 그 때 내 머릿속을 지배한 단어는 ‘산소포화도’였다. 내 혈액이 산소를 운반하지 못한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산소포화도가 떨어져 마침내 죽을 것이라는 공포가 밤의 나를 짓눌렀다. 견디다 못해 남편을 깨웠고 한참 숨을 몰아쉬다가 밖으로 나갔다.


그때도 겨울이었다. 신도시가 이제 막 들어서느라 아직 비어 있는 새벽의 도시를 걷고 또 걸었다. 한참을 걷다 그 숨 막힘이 잠잠해질 즈음 들어와 다시 잠을 청했다. 이후로도 ‘산소포화도’ 공포는 간헐적으로 찾아왔다. 어쩔 때는 슬쩍 들어왔다 나가기도 했고, 어쩔 때는 지독한 공포로 나를 짓눌렀다. 그땐 그것이 몸의 증상인지 마음의 증상인지도 몰랐다.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삶이 고단했던 시절이었기에 어느 쪽이든 확인하기 두려웠고 그 두려움이 성가셨다. 나중에 확인한 그 증상은 몸이 아닌 마음의 증상이었고, 그 마음의 이름은 ‘공황장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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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드라마를 보며 어느 겨울 문득 찾아온 그 때 그 마음이 떠올랐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혹시 드라마를 보다가 그 공포가 불쑥 환기되지는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마음 한구석이 울렁거렸다. 불안한 울렁임에도 드라마를 중단하지 못한 것은 드라마에 나오는 여러 마음들에 내내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우울증, 조울증, 망상장애, 공황장애, 불안장애 등으로 불리는 마음과 그 마음의 주인들의 이야기는 아프고 따뜻했다.


우리는 모두
낮과 밤을 오가며 산다.
우리 모두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있는
경계인들이다.


정다은(배우 박보영) 간호사의 말대로 마음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어디 즈음을 쉼 없이 흘러간다. 정상과 비정상을 굳이 정의하자면 고통과 불안, 즐거움과 기쁨을 느껴야 할 때 느끼고 해소하는 상태일 것이고 비정상은 그렇지 못한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사는 내내 느껴야 할 감정을 충실히 느끼고 충분히 해소하며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구나 어느 언저리에서는 불안이나 슬픔에 잠식당해 기쁨의 영역까지 침범당하기도 하고, 기쁨과 황홀함에 잠식당해 괴로움의 영역까지 외면하기도 한다. 그 상태가 심해지거나 오랜 시간 지속되면 그 마음에는 진단이 내려지고, 이름이 붙는다. 그리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길을 찾지 못한 마음이 어긋난 방향으로 한없이 흘러갈 수도 있다. 마음은 물과 같아서 한 번 방향을 잡아 흐르기 시작하면 되돌리거나 바꾸기 힘들다.


많은 이들이 컴컴한 험지로 흘러가는 마음을 뻔히 보면서도 다시 불러들이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붙잡으려 애쓸수록 멀어지고, 벗어나려 할수록 깊이 빠져버리는 험지. 들어가는 길은 무섭게 빨라도 나오는 길은 애처롭게 더디기만 한 험한 마음의 영토. 그곳 어딘가에서 속절없이 서성이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던지며, 아무렇지 않게 술잔을 기울이면서. 드라마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화적연 물 위로 물수제비를 뜨던 이들의 마음 어딘가에도 어두운 영토가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자포자기와 간절함 사이에서 어느 쪽 마음의 줄을 잡아야 할지 몰라 괴로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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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적연은 아주 오래된 화강암을 그보다 덜 오래된 현무암이 덮고, 그 사이로 물과 바람이 지나면서 만든 바위와 절벽이 있는 물터다. 흔들리고 부서지고 깎여나가 지금의 모습이 된 바위들은 언뜻 무채색의 단순한 광물처럼 보이지만 그 암석은 상상할 없이 길고 지난한 시간을 보내며 그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가늠할 수 없는 세월을 침식당하고 풍화될 것이다.
나는 화적연 가장자리에 앉아 계속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내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저 바위는 이전의 바위로는 돌아가지 못하겠지.”
“뭐? 잘 안 들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사진을 찍던 백에게 드라마와 침식과 풍화와 시간과 바위를 헤매던 마음이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은 너무 멀리 있었다. 상관없었다. 물과 바람의 시간을 통과한 암석은 이전의 암석으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나 역시 화적연에 오기 전의 나로 되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이 시간도, 이 겨울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다만, 마음은, 어느 겨울 차가운 공기로 숨을 쉬며 더 할 나위 없이 느긋하고 잔잔했던 마음은 어딘가에 단단한 암석이 되어 내가 어두운 곳을 헤맬 때 돌아보고 찾아올 이정표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그 이정표가 부디 잊히고 닳지 않길 바라며 바지를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적연: 드라마에서 다은과 고윤과 유찬이 소풍가서 물수제비를 뜨던 곳이 화적연이다. 한탄강 상류에 커다란 못과 화강암 바위가 있는 곳으로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지다. 넓은 잔디밭과 캠핑장 잔잔한 물가가 아름다운 곳이다.
주소: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산115-0 자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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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여진

주중에는 주로 번역을 하고 주말과 휴일에는 산책 여행을 다닌다. 파주 ‘번역인’ 작업실에서 작업하면서 월간지에 여행 칼럼을 기고한다. 저서로 『토닥토닥, 숲길』, 『슬슬 거닐다』, 역서로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2』 외 수십 권이 있다.

사진. 백홍기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사진디자인 석사학위 과정을 마쳤다. 저서로 『토닥토닥, 숲길』, 『슬슬 거닐다』, 『푸른 소나무의 땅 이야기』가 있고 [아파트 연가], [숟가락]을 비롯해 다양한 작품 활동 및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