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위드 코브프라

드로잉 라이트,
빛을 그리는 아티스트

조정훈 조명감독

KoBPRA WEBZINE vol.85  INTERVIEWER 오로라프로젝트  

드라마 촬영장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 중 하나는 높은 크레인 끝에 달린 빛나는 조명이다. 빛으로 공간을 창조하고 드라마의 감정을 그리는 조명. 과묵한 표정으로 촬영에 임하는 스태프의 표정이 조금은 무섭게 보였다고 고백하니, 무거운 조명 장비를 안전하게 움직여야 해서 모두 집중하느라 그렇게 보였을 거라고 해맑은 표정으로 대답해주는, 주광색 전구같은 따뜻함을 가진 조정훈 조명감독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조정훈 감독님.
그동안 참여하신 작품과 함께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드로잉 라이트’에서 조명감독으로 일하고 있는 조정훈이라고 합니다. 드로잉 라이트는 저와 같은 조명감독 3명이 모여 만든 팀이에요. 이 일을 시작한 지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네요.

처음에는 하나의 작품만 하기보다 동시에 여러 작품에 참여했어요. 점점 경력이 쌓여가면서 한 작품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2000년 KBS에서 방영된 <가을동화>가 있고요. 이후 <꼭지>, <야망의 불꽃>, <수상한 삼형제>, <왕가네 식구들>처럼 장편 드라마, 주말 드라마, 일일 드라마 위주로 참여했어요. 2004년에는 KBS <불멸의 이순신>에 참여했었는데 이 작품은 제작하는 데만 3년이 걸려서 그런지 특히 기억에 많이 남아요. 최근에는 2018년 JTBC에서 방영된 <뷰티인사이드>, <청춘시대>와 2021 KBS에서 방영된 <연모> 그리고 작년에 MBC에서 방영된 <금수저>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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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연모> 촬영 현장



정말 오랜 시간, 많은 작품에 꾸준히 참여하셨습니다. 조명 작업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셨고, 어떤 점이 지금의 자리로 이끌었나요.
당시에는 국내에 관련 학교나 기관이 흔치 않았고, 이 직업에 대한 인식도 대중적이지 않았어요. 저도 당연히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배우며 이 일을 천직으로 삼아야지 하고 시작한 건 아니에요. 제가 연극을 참 좋아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조명 작업을 도와주게 되었어요. 그런데 한두 번씩 참여 하다 보니 조금씩 흥미가 생기더라고요. 그렇게 쌓인 기분 좋은 경험들이 제가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올 수 있게 길을 비춰준 것 같아요. (웃음)

하지만 일만 놓고 본다면 분명 힘든 노동이었죠. 게다가 조명 장비가 대부분 꽤 무거워서 조심히 다뤄야 했어요. 그런데 그 노동이 뭐랄까, 적어도 저에겐 무의미한 반복 행위가 아니라 창조의 과정이었어요. 그리고 힘든 촬영을 마치고 나면 스태프와 연기자가 모여 새벽까지 술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때는 방송국 주변에 새벽까지 영업하는 포장마차가 있었거든요. 그런 시간이 꽤 낭만적이었어요. 노동은 힘들었지만, 조명으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동료들과의 교감 또한 지금의 이 길을 걸어오게 만든 소중한 힘이네요.
힘든 촬영 후에 새벽까지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대의 ‘낭만’이 요즘에도 남아있나요?
당시의 분위기였던 것 같아요. 촬영이 늦게 끝나도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뭐라도 사주려고 불렀어요. 그렇게 한두 명 모이다 보면 연기자들도 합석하고 작품 이야기도 나누고 친분도 쌓고 그랬죠. 조명, 촬영 등 분야 상관없이 선배, 형, 누나, 언니들이 후배나 동생들을 많이 챙기고 나누던 시절이었으니까요. 힘든 일이다 생각하면 그럴 수 있지만 전 그 끈끈한 정, 그게 좋더라고요. 요즘은 사실 그런 문화를 낯설게 느끼는 후배들이 많죠. 제작 환경 뿐만 아니라 모든 조직이 다 그렇지 않을까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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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의 매력은 어떤 걸까요?
드라마는 수많은 분야가 모여서 만들어내는 공동 작품이죠. 그 속에서 조명의 역할은 ‘빛’을 이용해 작품을 그린다고 생각해요. 특히 밤 촬영에서 큰 역할을 하죠. 다양한 빛으로 보이지 않았던 곳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공간의 창조와 더불어 그 공간의 따뜻함, 차가움, 공포와 같은 감정도 더할 수 있죠.
다른 스태프들과의 협력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네, 물론이죠. 기획과 출연진이 탄탄해도 실제 현장에서 연출부와 제작팀과의 호흡이 매우 중요해요. 그래서인지 좋은 팀워크로 작품을 끝내면 그 팀이 다음 작품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소모적인 과정을 줄이고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죠. 저 같은 경우도 오랫동안 함께 호흡을 맞춘 연출팀에게 작품 제안을 받으면 훨씬 더 긍정적으로 검토를 하는 편이에요. 서로 신뢰가 있으니까요. 드라마나 영화에서 누구누구 사단 하는 말들이 이런 식의 팀이 모인 경우라고 할 수 있죠.
작품 속 조명 콘셉트는 어떻게 정해지나요?
드라마 장르도 중요하지만, 드라마 속 공간의 흐름을 가장 먼저 파악하는 것 같아요. 일반 조명으로 할 수 있는 곳과 나이트클럽과 같이 특수 조명을 써야 하는 곳도 구분을 해야 하고, 평범한 공간이지만 대본 상 특수 효과를 내야 하는지 여부도 체크해요. 여기에 캐릭터의 성향, 연출가와 촬영 감독이 원하는 구도도 함께 고려해야 해요. 하지만 이렇게 세팅을 해도 막상 현장에 오면 전혀 달라지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상황에 맞게 대응해야 하는 점도 감안하는 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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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촬영 현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바로 그 ‘변수’인데요. 이 코너의 인터뷰를 하면서 매번 빠트리지 않고 여쭤보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조명팀이 만나는 ‘변수’는 어떤가요?
가장 큰 변수는 날씨에요. 높은 산길에 발전차가 가기로 했는데 비가 와서 길이 유실된 적이 있었어요. 할 수 없이 산 아래부터 사람들이 조명 장비를 모두 운반해야만 했죠. 그리고 가끔 전기가 없는 곳에서 촬영이 이루어질 때가 있는데, 최근 근처에서 전기를 빌리거나 그것도 힘들면 소형 발전기를 많이 들고 가기도 해요. 또 하나의 변수는 대본상 낮 촬영이어도 촬영이 지연되어 밤이 되면 낮처럼 밝게 촬영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는 대형 크레인을 사용하기도 해요. 일종의 인공 태양과 같은 기능을 하는 거죠.
조명 장비도 예전에 비해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을 거라 생각합니다.
네, 꽤 많은 변화가 있었죠. 우선은 무게의 변화인데요, 조명 장비는 대부분 무거운 편인데 기술이 발전하면서 점점 가벼워지고 있어요. 또 예전에 저희가 농담처럼 조명도 카메라처럼 충전기를 끼워서 전기를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지금은 정말 그대로 되었죠. 예전에는 최대 100m 이상의 전선을 늘 가지고 다녔어요. 선을 설치하는 작업도 엄청나게 오래 걸렸죠. 조명 기기의 성능 또한 정말 좋아졌어요. 무엇보다 예전에는 고가의 필터를 사용했지만, 지금은 라이트 자체에 색을 변경하는 기능이 생겼어요.
이 인터뷰를 기획했을 때 처음 떠올렸던 이미지가 스포트라이트가 향하는 무대 뒤 스태프들의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조명 감독님을 처음 생각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스포트라이트가 향하는 곳은 화려하잖아요. 직접 그 빛을 비추고 있는 분의 시선에서 촬영 무대는 어떤 의미인가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그 의미를 일상의 모습에 비춰본다면 마치 새벽을 여는 첫 버스 같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첫 차를 탄 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꽉 차서 앉을 자리가 많이 없는 거예요. “아니 6시도 안 된 시간에 이렇게 사람이 많아?”라고 생각했죠. 조명팀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첫 차가 새벽을 연다고 하면 조명팀은 드라마 촬영장을 가장 먼저 연다고 할 수 있겠네요.
조명에 대해 연기자가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될 만한 팁이 있을까요?
촬영 장면에서 카메라 워킹과 조명의 위치를 미리 파악해 두면 연기하실 때 도움이 되실 거에요. 하지만 신인 배우나 촬영 경험이 적은 연기자분들은 사실 현장에서 대본이나 연기에만 집중하는 것도 벅차서 카메라나 조명까지 신경을 쓸 수가 없죠. 예전에 신인 연기자가 연기를 하면서 조명 앞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그림자를 만들었는데, 선배 연기자가 자연스럽게 연기를 하면서 후배 연기자를 그림자 밖으로 리드 하더라고요. 촬영 전에 조명 스태프들과 의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저는 배우의 감정선이 드러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리허설 때 연기자와 충분하게 의견을 공유하는 편이에요.
촬영 현장 안팎에서 특별한 기억으로 남은 방송실연자가 있을까요?
너무 많아서 잠시만요. (웃음) 초창기 작품부터 생각해 보면 선우은숙 선배님, 김혜숙 선배님, 이보희 선배님, 윤미라 선배님 등 많은 연기자 선배님이 촬영 스태프들을 정말 알뜰하게 챙겨주셨어요. 밥은 잘 먹었냐, 잠은 충분히 쟜냐 하고 늘 물어봐 주셨죠. 촬영 중에 잠깐 조는 스태프 옆에 가서 잠시 기대게 해주시기도 하셨어요. 최근 작품에서는 <연모> 촬영할 때 만난 박은빈 배우와 <오혜영>에 출연한 서현진 배우가 기억에 남아요. 모두 정말 따뜻하고 정이 많았어요. 두 배우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많이 잘 돼서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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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원빈, 배우 신현진, 배우 박은빈, 로운과 함께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



조명 감독님으로 가지고 있는 특이한 습관도 있으신가요?
전혀 의식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보니까 제가 집에서 전기선들을 다 동그랗게 말아서 정리를 해 놓았더라고요. 그걸 발견하고 혼자서 한참 웃었어요. (웃음)
작업 환경이나 처우에 대해 여쭤볼게요. 예전에 비해 변화를 느끼시나요?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죠. 그리고 앞으로도 더 좋아지길 바라고요. 하지만 그 바람은 조명팀 뿐만 아니라 드라마 제작팀이 좋아진다면 조명 스태프든 촬영 스태프든 제작 스태프 모두 함께 좋아질 거로 생각합니다. 요즘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인식이 많이 높아졌지만, 예전에는 논의조차 쉽지 않았거든요. 지금의 위치까지 온 것이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만든 것도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는 모두 힘을 합쳐 연대의 힘을 길러야 하는 데 동의하겠지만 어딘가에 소속된 스태프로서, 이상적인 바람과 현실의 갭은 여전히 큰 점은 늘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있으시면 부탁드립니다.
웹진을 통해 연기자분들과 동료들에게 인사를 할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예전처럼 술잔을 기울이는 시간은 적어졌지만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잡히길 바라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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