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지 산책 에세이

비밀과 아픔과
기쁨의 울타리,
가족

드라마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의 촬영지, 덕수궁 돌담길

박여진 여행 작가, 백홍기 사진 작가

가족.
대체로
첫 숨과 마지막 숨을 지켜봐 주는 이들.
태어났을 때는 세계의 전부였다가
어느 순간 너무 좁게 느껴지기도 하는,
더러는 든든한 울타리고
더러는 속박의 굴레로 여겨지기도 하는,
너무 많은 걸 알고
너무 많은 걸 모르는.
더러는 사랑으로 더러는 애증으로
더러는 힘으로 더러는 짐으로
기쁨과 슬픔 사이 어딘가에서 공존하는.


드라마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가 처음 방영되었을 때는 시큰둥했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환기하는 이미지가 너무 전형적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렇고 그런, 원망과 사랑 어딘가에서 갈등을 빚다가 ‘화목’이라는 명분으로 다시 화해하는 그런 드라마라고 생각해서 보지 않다가 우연히 재방송 채널에서 방영되는 것을 보고 단숨에 끝까지 몰아봤다. 물론 크게 본다면 전형성의 테두리 내에 있기는 하지만, 드라마는 더 섬세하고 어두운 곳을 더듬는다. 조금은 지독하고 조금은 아프기도 하다.


‘가족이란 뭘까?’

이 질문은 이진숙 (원미경 분)이 드라마 후반부에 던지는 질문이지만 나는 첫 회부터 이 질문이 떠올랐고 드라마를 보는 내내 그 답을 찾았던 것 같다. 정답이 없는 질문. 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한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가족이기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알고, 가족이기 때문에 너무 많은 걸 모르는 이야기들이 비밀과 아픔과 기쁨 사이를 순환하며 이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깊은 아픔도 아무리 넘치는 기쁨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수렴되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운명처럼 우리를 감싼 그 울타리 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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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에도 돌담이 울타리처럼 감싸고 있다. 오래 전 왕의 가족이 기거하던 그곳은 명례궁에서 경운궁으로, 황궁으로 그리고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에 훼손되고 상했으나 어찌어찌 살아남았다. ‘어찌어찌’에는 한 가족의 역사처럼 수많은 질곡과 수난의 시간이 담겨 있다. 화재와 소실, 무너짐, 재건, 훼손, 복원 등의 시간을 거쳐 지금은 ‘연인이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슬픈 전설을 지는 도심 속 작은 궁궐이 되었다. 밤에는 따뜻한 불이 환하게 켜지고 어여쁜 한복 차림의 손님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는 궁궐.


덕수궁에 처음 간 것이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가장 먼 기억에서는 동생과 함께 손과 뺨에 찐득하게 달라붙은 솜사탕을 들고 지금의 나보다 젊었던 엄마, 아빠와 함께 갔다. 조금 더 생생한 기억에서는 학창 시절 사생대회를 가서 친구들과 김밥 도시락을 먹으며 깔깔댔다. 친한 친구와 폭삭 망한 주식 이야기를 나누며 그 길을 걷기도 했다. 가장 최근 기억에서는 백과 함께 조명이 환하게 들어온 중화전에 앉아 폐장할 때까지 사진을 찍고 두런두런 걷기도 했다. 20여 년 전, 새로운 울타리를 만들어 가족이 된 백과.


궁 밖으로 나와 돌담길을 걸을 때는 ‘그 전설’을 이야기하며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농담이긴 하지만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가족인 우리 부부는 ‘서류’만으로 간단히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농담의 말이 씨가 되지 않을까 은근히 신경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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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온전히 다 걸을 수 없던 돌담길 둘레는 2017년 영국대사관 소유의 땅이 개방되면서 궁 뒤쪽의 아늑한 골목길까지 다 걸을 수 있다. 회색 돌담과 검푸른 돌담 지붕 곁으로 초록의 나무들이 가지런히 서 있다. 돌담의 돌은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 모습처럼 제각기 다르다. 우리처럼 ‘그 전설’을 이야기하며 걷는 이도 있고,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를 흥얼거리는 이도 있고, 오래전 나와 동생처럼 솜사탕을 든 아이도 있고, 화사한 한복을 입고 한복보다 더 화사하게 웃으며 지나가는 이들도 있다. 상기된 표정으로 붉은 글씨가 새겨진 푯말을 든 채 시위를 벌이는 시위대도 가끔 지나간다. 저마다 살아온 시간만큼의 삶을 잔뜩 짊어진 채 다른 이들의 삶을 스쳐 지나가고 있다. 그곳 어딘가에서 은희(한예리 분)처럼 멋쩍은 고백을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또 어딘가에는 찬혁(김지석 분)처럼 연인을 뜨겁게 포옹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들 곁에는 돌담이 있다. 때로는 너무 당연해서 못 보고 지나치기도 하고, 때로는 걷다 힘들어 잠시 기대기도 하는. 솜사탕을 든 아이의 모습을 찍기 위해 비스듬히 기대기도 하고, 고적하게 걷다가 행복한 표정의 행인들 사이를 비껴가려고 잠시 멈추기도 하는 돌담이.
그리고 의식하건 하지 않건 모두 알고 있다. 울타리 안에 작은 궁전이 있다는 사실을.
크건 작건, 화려하건 허름하건, 들어가고 싶건, 들어가고 싶지 않건, 저마다 울타리 안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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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돌담길: 덕수궁대한문-덕수궁대한문 약 1.2km

에세이의 글과 사진은 PC해상도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글. 박여진

주중에는 주로 번역을 하고 주말과 휴일에는 산책 여행을 다닌다. 파주 ‘번역인’ 작업실에서 작업하면서 월간지에 여행 칼럼을 기고한다. 저서로 『토닥토닥, 숲길』, 『슬슬 거닐다』, 역서로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2』 외 수십 권이 있다.

사진. 백홍기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사진디자인 석사학위 과정을 마쳤다. 저서로 『토닥토닥, 숲길』, 『슬슬 거닐다』, 『푸른 소나무의 땅 이야기』가 있고 [아파트 연가], [숟가락]을 비롯해 다양한 작품 활동 및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