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보편적 문화향유권을 위한
한 걸음

한국어 더빙 의무의 법제화

조덕상  변호사

KoBPRA WEBZINE vol.86

한국 헌법은 전문과 제9조, 제69조 등을 통해 ‘문화국가의 원리’와 ‘문화적 기본권’을 보장하고 있다. 과거에는 국가가 문화의 영역에 부당하게 간섭하지 말고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원리가 강조되었다면, 최근에는 자율성, 창의성을 바탕으로 형성된 문화적 산물을 보다 많은 사회 구성원들이 평등하게 누릴 수 있소록 보장해야 한다는 법리도 중시되고 있다. 이러한 헌법 원리에 따라, 국가는 문화를 향유하는 데 있어 신체적,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개인이나 집단을 위해 적극적인 지원 또는 규제 정책을 마련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것이 우리가 ‘보편적 문화향유권’이라는 헌법상 기본권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보편적 문화향유권의 보장이라는 차원에서 올해 초 국회에서는 의미 있는 성과가 있었다. 2024년 1월 9일, 방송사업자가 수입 영상물을 방송할 때 한국어 더빙을 하도록 노력할 의무를 규정하는 내용의 『방송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이다. 한국성우협회와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등 실연자와 주요 수혜자들이 오랫동안 추진해온 입법 운동이 뒤늦게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 글에서는 방송사업자의 한국어 더빙 의무가 『방송법』으로 들어오기까지의 과정과, 보편적 문화향유권의 보장이라는 차원에서 개정안이 갖는 의의와 한계를 살펴보고,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과제는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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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더빙 법제화를 위한 노력


40대 이상의 시청자들 중에서는 KBS의 ‘토요명화’, MBC의 ‘주말의 명화’, KBS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중국 드라마 ‘판관 포청천’ 과 같이 더빙 외화 프로그램에 대한 추억을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일반 시청자들이 수입 영상물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제한되어 있었던 1980~90년대, 지상파 방송사업자들의 더빙 외화 프로그램은 시청률 경쟁의 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한국어 더빙이 갖고 있는 사회적 가치, 즉 장애인이나 노인, 어린이 등 다양한 시청약자들의 헌법상 기본권인 ‘보편적 문화향유권’의 보장이라는 가치는 그 시대에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후 수입 영상물을 보고 즐길 수 있는 경로가 크게 다양화되었으나, 정작 한국어 더빙은 지상파 방송과 그 외 영역을 가리지 않고 크게 축소되었으며, 더빙은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게임과 같은 일부 미디어에 편중되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한국어 더빙에 종사하는 성우들과 시각장애인들이 중심이 되어 방송사업자 등에게 수입 영상물의 한국어 더빙 의무를 부과하는 내용의 법안을 만들 것을 국회에 요청하였고, 이에 제19대 국회에서는 최동익, 김을동 의원이 『장애인차별금지법』, 『국어기본법』, 『방송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하였으며, 제20대 국회에서는 유동수 의원이 『방송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하였다. 한국성우협회 등에서는 방송사업자에게 부여된 높은 수준의 공공성을 강조하는 의견서를 제출하며 법안의 입법을 적극 촉구하였으나, 위 법안들은 사회적 관심 부족 등으로 인해 본회의에도 상정되지 못한 채 폐기되었다.


제21대 국회에서도 정희용 의원과 도종환 의원이 방송사업자에게 수입영상물의 한국어 더빙 의무를 규정한 『방송법』 일부개정법률안을 각각 발의하였으나, 위 법안들의 소관 상임위원회(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이하 ‘과방위’)가 위 의원들의 소속 상임위원회와 상이했던 관계로 입법 추진이 지체되었다. 이 문제에 오래 전부터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필자는 한국성우협회와 함께 국회에 위 의안들의 심사를 촉구하였고, 그와 별개로 과방위 간사를 맡고 있던 조승래 의원실에 별도의 입법안을 제공해 이를 발의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조승래 의원도 『방송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제출하였고, 3개 법안을 심사한 결과 과방위 위원장의 대안이 채택되어 2024년 1월 9일, 마침내 본회의를 통과하게 된 것이다.



한국어 더빙 의무 법제화의 의의와 한계


이번 개정으로 『방송법』 제69조 제12항이 신설되었다. 이에 따르면 방송사업자는 외국어 영화, 애니메이션 등의 방송프로그램을 방송할 때는 외국어로 된 대사를 한국어 음성으로 제공하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이 경우 방송통신위원회는 이에 소요되는 경비를 방송통신발전기금에서 지원할 수 있다.


개정안에서는 “우리말의 보존과 보호를 위해” 위 규정을 신설하였음을 명시하고 있는데, 이는 동법 제6조에 규정된 방송의 공익성 원칙에 따라 방송사업자가 한국어 더빙을 충실히 이행하도록 노력할 의무를 규정하는 것이다. 한국어 더빙을 통한 한국어 보존과 보호는 헌법상 문화국가의 원리와도 상통하는 입법 취지이다. 또한 개정안에서는 한국어 더빙 프로그램 제작에 방송통신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여 방송사업자가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두었다는 의의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 개정안에서는 의의 이상으로 한계점 또한 뚜렷하다. 우선 장애인, 아동, 노인 등 다양한 시청 취약 계층의 보편적 문화향유권을 보장하기 위한 목적도 개정안에 명시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방송사업자에게 ‘노력할 의무’만을 규정하고 있을 뿐 어느 정도 목표 수준까지 한국어 더빙을 해야 하는지, 이러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방송사업자를 어떻게 규제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은 개정안에 담기지 못했다. 물론 의무 규정이 신설된 만큼, 앞으로 시청자들과 한국성우협회 등에서 방송사업자들의 한국어 더빙 프로그램 제작 실태를 모니터링하면서 방송사업자들에게 적극적으로 프로그램을 편성할 것을 요구할 수 있고, 방송사업자들이 소극적일 경우 국정감사 등을 통해 그 실태를 지적하는 방법으로 방송사업자를 압박할 수도 있을 것이나 실효성이 얼마나 담보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보편적 문화향유권의 확대를 위한 향후 과제


필자는 『방송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연구하면서, 한국어 더빙을 기존의 『방송법』 에 규정된 ‘장애인방송’의 수단으로 편입하는 안을 제시한 바 있다. 흔히 “자막 VS 더빙”이라는 시청자 선호도의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 한국어 더빙을 한국수어, 폐쇄자막, 화면해설과 같이 시청약자들을 위해 필수적으로 제공되어야 하는 수단으로 인식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장애인방송’이라는 용어를 ‘배리어프리(Barrier-free) 방송’, 즉 장애인을 비롯한 모든 시청자들이 장벽 없이 다양한 보조 수단을 통해 미디어를 평등하게 접할 수 있는 방송이라는 용어로 바꾸자는 제안도 했다. 위와 같이 법안이 개정될 경우, 방송사업자는 단순히 노력할 의무가 아니라, 방송통신위원회의 고시를 통해 한국어 더빙 프로그램을 편성, 제작해야 할 구체적 의무를 이행할 책임이 발생한다. 조승래 의원안의 이러한 내용이 방송사업자들과 방송통신위원회의 반대 의견으로 이번 개정에 반영되지 못한 것은 무척 아쉬운 부분인데, 향후 『방송법』 의 개정 작업이 다시 이루어진다면 국회에서 이런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즉 모든 방송 시청자들이 한국어 더빙을 비롯한 시청 보조수단 중에서 자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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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넷플릭스 등 국내외 OTT 사업자들과 IPTV 등에서의 한국어 더빙 확대 문제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들 사업자들이 각종 수입 영상물에서 방송사업자들보다 한국어 더빙을 더 적극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편이지만, 애니메이션을 제외한 외화나 다큐멘터리 등에서는 ‘어벤저스 시리즈’와 같이 팬층이 두터워 한국어 더빙 버전의 자체적인 시장성이 높은 작품 외에는 한국어 더빙이 된 작품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한국 외의 비영어권 국가들에서는 방송사업자들이 수입 영상물에 대한 자국어 더빙을 충실히 제공하고 있으며 그에 발맞추어 OTT 업체들도 다양한 작품의 음성 더빙을 제공하고 있다. 흔히 프랑스, 아르헨티나 등과 같이 자국어 보호를 위해 수입영상물의 자국어 더빙 의무를 오래 전부터 법제화한 국가들의 사례가 언급되곤 하는데, 방송사업자가 아닌 OTT 사업자들과 IPTV 등도 한국어 더빙을 늘릴 수 있도록 촉진하는 입법안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한계도 분명하지만, 이번 『방송법』 개정안은 그동안 한국 사회가 간과하고 있었던 ‘보편적 문화향유권’이라는 가치를 일깨우는 중요한 첫 걸음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많은 이들의 고민과 노력을 통해 이 첫 걸음이 보다 많은 시민들에게 평등한 문화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는 길을 열어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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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상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변호사

서울대학교 법학과와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한 후, 현재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문화예술스포츠위원회 소속 공익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성우를 포함한 실연자, 예술창작자들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법과 정책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