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in KoBPRA

배우
양형욱


배우라는 수식어 외에 그 어떤 수식어도 떠오르지 않는 사람.
연극무대와 드라마 속에서 오직 배우로만 존재하던 사람.
서글서글하고 장난기 가득한 눈빛도 ‘연기’라는 단어만 나오면
웃음기가 사라지고 예리하게 빛나는 사람.
배우 양형욱을 만났다.

 INTERVIEWER 박여진   PHOTO 백홍기
드라마 <빅마우스> 이야기부터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노박이 빅마우스로 밝혀지는 순간은 드라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노박의 캐릭터가 빅마우스 캐릭터로 전환되는 순간의 눈빛과 목소리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전혀 없던 눈빛과 목소리였으니까요. <빅마우스>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작품에 들어가기 전 작가 세 분과 PD님이 저를 만나자고 하더군요. 대본은 아직 보여줄 수 없지만, 대략 이런 배역을 맡아줄 수 있느냐고요. 제가 평소 코믹한 연기를 많이 했던 배우라 의심을 사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처음에는 빅마우스 티를 내지 않으려고 최대한 유쾌한 노박 연기에 몰입했어요. 작가분들도 편안하게 하라고 해서 웃긴 대사도 시도하고 하다 보니 조금씩 욕심이 나더라고요. 나중에는 조금만 덜 웃겨달라고 하더라고요(웃음). 나중에 빅마우스가 되어야 하는데 너무 웃겨도 좀 그렇다고요.

배우라는 게 그래요. 선장의 위치에서는 조타수며 노 젓는 사람 등 모든 분야의 사람들 역량이 다 보이잖아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그 역할만 하면 내가 노를 빨리 젓고 있는지 느리게 젓고 있는지 안 보일 때도 많죠. 아무튼 대부분 배우와 스텝들에게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그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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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는 아무래도 제가 연극 무대에서 오래 활동했기에 노박과 빅마우스에 맞게 목소리를 바꿔가며 연기했던 것 같아요. 연극이라는 게 워낙 함축적인 분야이다 보니 목소리나 연기에도 많은 부분이 압축되어 있거든요. 특히나 드라마 설정상 정전이 된 상황과 라이터 불 하나만 있는 공간에서 그 연기를 해야 했어요.
처음엔 일어서서 하려고 했는데 어두운 공간이라 표정이나 이런 부분이 잘 보이지 않아서 결국 앉아서만 연기를 해야 했죠. 공간이 제한적이다 보니 목소리에 더욱 집중했던 부분도 있었어요.

눈빛은, 제 딸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빅마우스도 자식을 잃은 아버지잖아요. 제 딸을 생각하니 빅마우스에 강하게 몰입이 되었어요. 너무 몰입해서 도중에 절제해야 했을 정도로요. 아무래도 자식만큼 부모의 마음을 움직이는 존재도 없으니까요.

대화를 나누는 중간중간 그는 ‘빅마우스’ 대사를 읊었다.
그때마다 그 자리에 유쾌하고 다정하게 인터뷰하던 인간 양형욱은 없었다.
날카롭고 슬픈 눈빛에 회한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빅마우스만 있을 뿐.


따님이 있나요?
네. 지금 모 방송국 저녁 뉴스 아나운서예요. 너무 자세히 이야기하면 딸이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아무튼 이십 대 중반도 되지 않은 딸이 기특하게 제 갈 길을 잘 찾아가고 있어서 굉장히 뿌듯합니다. 저처럼 생기지 않고 굉장히 예뻐요. 저도 젊어서는 잘생겼다는 소리 곧잘 들었어요(하하). 딸 자랑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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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와 관련해 배우님의 ‘첫’ 순간들이 궁금합니다. 첫 무대, 첫 연기 등이요.
80년대 당시 <별들> 시리즈가 굉장히 인기 있었어요. <방황하는 별들>, <꿈꾸는 별들>, <이름 없는 별들>, <외로운 별들>, <불타는 별들> 이렇게 5부작 연극이었는데 다섯 편 모두 출연했어요. 아마 연극배우 중에서도 흔치 않은 경력일 거예요.
처음엔 제가 연기를 잘하는 줄 알고 연기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제가 했던 연극에서 먼저 했던 선배의 연기를 보니 제가 연기를 잘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연출에게 혼도 많이 났고요. 그래서 더 열심히 했어요. 인물 분석과 시나리오 연구는 물론이고 제가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을 최대한 잘 표현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습니다.
이전에도 연극무대에 서긴 했지만, 표를 구입해서 들어온 관객 앞에서 공식적으로 선 첫 무대는 방황하는 별들이었어요. 드라마는 <선생님, 우리 선생님>(1988년 1월)이 데뷔작입니다. <우리 읍내>(1988년 10월)가 데뷔작으로 알려져 있던데 <선생님, 우리 선생님>이 먼저였어요. 오토바이 타고 다니며 말썽 많이 피우는 아들 역할이 제가 맡은 첫 역할이었습니다.

드라마와 연극은 많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연극 무대에서의 노박과 드라마에서의 노박은 배우에게도 관객에게도 무척 다를 것 같은데 어떤가요?
다르죠. 일단 공간이 다르니까 배우의 발성과 함축성도 많이 달라요. 드라마는 평소 호흡대로 발성해도 오디오가 섬세하게 그 발성을 다 잡아주지만 연극은 그렇지 않잖아요. 객석 맨 뒷자리에 있는 관객에게까지 속삭이는 소리, 한숨 모두 잘 전달돼야 하니까요.
게다가 연극은 한 번뿐인 무대라는 점에서 긴장감이 더 강하죠. 설령 여러 날 같은 공연을 한다고 해도 어제 공연과 오늘 공연이 완전히 같지는 않아요.
드라마는 극이 흐르면서 캐릭터를 조금씩 성숙시키는 과정도 있지만, 연극은 처음부터 캐릭터를 완벽히 구축해서 무대에 오른 뒤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에요.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연극 공연을 여러 번 보는 사람도 있잖아요. 예전에는 그렇게 여러번 보러 온 사람이 객석 맨 앞에 앉아서 제가 대사를 하기 전에 제 대사를 외워서 미리 말하기도 했어요 (웃음). 정말 김빠지죠. 반전, 유머 등을 하려고 하는데 관객이 먼저 해버리니까요.
그래서 공연 전에 ‘공연 전에 보신 분들 미리 대사하지 마세요’라는 푯말을 들고 다니기도 했어요. 제가 그렇게 하자고 아이디어를 냈죠. 그런데 드라마에도 그 비슷한 현상이 있더라고요. 빅마우스 정체가 탄로나기 전인데 누군가 댓글로 ‘노박이 빅마우스다. 내 사촌의 지인이 관계자인데…’라면서 글을 썼더라고요. 어찌나 얄밉던지(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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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드라마 외에 다른 방송 활동하시는 모습은 거의 못 봤습니다. 예능에 출연해도 상당히 잘하실 것 같은데 생각 없습니까?
거기에도 좀 웃긴 사연이 있어요. 제가 연극 전공이거든요. 예전에는 연극과 사람들이 무게를 좀 잡는 경향이 있었어요. 저도 그랬고요. 그래서 예능 쪽을 꿈꾸는 후배들을 꾸짖은 적도 있다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참 부질없는 짓인데요. 아무튼, 제가 뱉은 말이 있다 보니 예능 섭외가 와도 조금 머쓱한 기분이 들어 사양한 적이 있어요.

80년대 데뷔하셨을 때와 지금은 드라마 시장이 정말 많이 달라졌잖아요. 채널 수는 물론이고 제작 환경도 그렇고, 다양한 OTT 플랫폼도 생겼고요. 이렇게 채널과 플랫폼이 다양해진 것이 배우에게는 어떤 영향이 있습니까?
채널이나 플랫폼이 많아졌다고 해도 배우들의 처우나 수입이 눈에 띄게 좋아진 부분은 없는 것 같아요. 여전히 부족한 처우나 수입으로 힘들어하는 배우들도 많고요. 채널과 플랫폼이 다양해질수록 배우들에 대한 처우도 좋아졌으면 합니다. 그래야 배우들도 더 나은 환경, 더 좋은 여건에서 양질의 연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의 문화 콘텐츠 역량을 더욱 강화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사적인 부분에서 아쉬운 부분도 있어요. 방송국이 몇 개 되지 않던 시절에는 여의도에 오면 동료 배우, 선후배 배우들을 자주 만나곤 했는데 지금은 서로 작품하고 돌아가면 그만이라 동료애나 관계도 오히려 얇아진 것 같아요. 방송 현장에서 배우들을 마주쳐도 모르는 분도 많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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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라는 직업이 체력과 감정을 많이 소모하는 직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휴식을 취하나요?
가까운 사람들과 식사나 술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게 좋더라고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스트레스가 많이 풀려요. 골프도 좋아해요. 제가 운동을 꽤 좋아했어요. 예전에는 피겨스케이트도 했었고 스키도 했더랬죠. 연예인 스키대회에서 상도 두 번 받았어요. 학창 시절에는 야구도 좋아했고요. 사람과 운동. 제 휴식 방법입니다.

좋아하는 배우가 있나요?
주현 선배님을 좋아합니다. 선배님 특유의 유머 감각과 재치 넘치는 연기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특히 선배님은 스텝들에게 무척 자상하세요. 그런 성숙한 인간미를 존경합니다.
외국 배우 중에는 조 페시(Joe Pesci)를 좋아합니다. 영화 <나 홀로 집에>에서 키 작은 도둑 해리 역을 했던 배우죠. 그 역할로 많이들 알고 있지만, 갱 역할로 연기할 때는 굉장한 카리스마를 뿜는 배우예요. 특히 조 페시는 억양이 매력적인 배우예요. 영어 억양인데도 톤의 높낮이 차이가 매우 커서 특유의 강렬한 연기를 보여주곤 하지요. 제가 빅마우스 연기를 할 때도 이 배우의 억양을 많이 공부했어요. 다니엘 데이 루이스(Daniel Day Lewis)와 말론 브란도(Marlon Brando)도 좋아합니다. 특히 말론 브란도의 목소리 연기는 일품이라고 생각해요.

연기를 꿈꾸는 사람들 혹은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연기를 좋아해서 연기를 하는 건 괜찮아요. 그런데 연기자가 되고 난 후 혹시라도 생길지 모를 유명세, 스포트라이트, 화려함 등이 좋아 뛰어들지는 않았으면 해요. 연기자가 받는 화려한 조명은 연기에 당연히 따라오는 결과가 아니라 생길지 안 생길지 모르는 운 같은 거예요. 거기에 너무 현혹되지 않았으면 해요.
연기는 깊은 연구와 노력을 토대로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직업이에요. 또 모두가 주인공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주연이 있고 조연도 있지요. 비중이 작은 역할이라고 해서 작은 연기자가 아니에요. 연기에 있어서는 모두 동등하죠. 어떤 분량이든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도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계획 중인 일이 있나요?
연극 제작 과정이나 연극을 유튜브에 올리고 싶어요. 유튜브는 아직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그런데 최양락 코미디언이 하는 걸 보니 문득 저도 연극 이야기를 유튜브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직은 생각에만 머물러 있는 단계입니다. 또 기회가 된다면 연극과 연기 관련한 글도 쓰고 싶고요. 연기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더 많이 공유하고 싶어요. 그게 제가 하고 싶은 일입니다.


배우 양형욱에게 연기는 온 삶을 걸고 달려온 하나의 길이었고, 앞으로도 가고 싶은 길이었다. 그의 몸과 눈과 목소리를 통과했던 수많은 인물이 그 안 어딘가에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단순한 ‘흉내’에 그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던 배우 양형욱이 그 반짝이는 눈에 담을 다음 인물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