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의 서재는 탤런트, 성우, 코미디언 등 방송실연자의 다양한 감정과 영감, 창의력에 도움이 되는 양서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소설, 산문, 시, 인문학서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이 방송인 여러분에게 반짝이는 뮤즈가 되어 주길 기대합니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단테

“나를 거쳐서 길은 황량의 도시로
나를 거쳐서 길은 영원한 슬픔으로
나를 거쳐서 길은 버림받은 자들 사이로.

나의 창조주는 정의로 움직이시어
전능한 힘과 한량없는 지혜
태초의 사랑으로 나를 만드셨다.

나 이전에 창조된 것은 영원한 것뿐이니,
나도 영원히 남으리라.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신곡 지옥편 중”


인간 내면의 지옥과 낙원을 탐험하고 싶은 이들에게,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지옥과 낙원이 있다. 1308년부터 1320년까지 단테 알리기에리는 인간 내면의 지옥과 낙원을 장대한 서사시로 그려냈다. 기독교의 윤리와 철학뿐 아니라 인간 내면을 깊이 들여다본 이 작품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음악으로, 문학으로 많은 이들의 영혼을 어루만진다. 9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지옥에서 단테는 불신, 음욕, 분노, 탐식, 낭비, 인색, 폭력, 이단, 기만 등을 마주한다. 연옥편에서는 고통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성찰의 여정이 이어진다.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과 구원에 관한 탐구가 다양한 심상과 상징으로 그려진다. 낙원편에서 단테는 별과 천사들의 빛, 여러 성인들을 통해 깊은 영혼의 깨달음을 얻는다.

살다 보면 누구나 평생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지옥을 품게 된다. 가슴 깊은 곳에 아무 빛도 들이지 않고 묻어둔 그 지옥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양 부인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지옥은 그 자체만으로 이미 지옥이다. 아무리 묻고 감춰도 없던 것이 되지 않는다. 내면의 지옥을 낱낱이 들여다보고 처절하고 고통스럽게 그 지옥을 통과했을 때 비로소 지옥은 해소 解消된다.

아물지 않는 지옥을 품은 이들에게 한 권의 책으로 그 지옥을 없앨 수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은 최소한 지옥의 문 앞까지 가게 해 줄 동반자는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지옥의 문을 열지 말지는 개인의 선택이다. 영원히 지옥을 품고 살지, 그 지옥에서 빠져나와 단단한 마음 밭에 발 딛고 살지 역시 개인의 선택이다. 마음 깊은 곳 가장 저열한 욕망, 가장 고통스러운 폭력, 가장 괴로운 분노를 마주하고 인정하고 통과하길 바라는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단테 지음 | 박상진 역 | 민음사 |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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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사전
안젤라 애커만, 베카 푸글리시

“트라우마의 모습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여러분의 브레인스토밍을 위해 다양한 상처들을 나열했지만, 모든 상처를 총망라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캐릭터의 과거를 탐구하여, 그 인물을 규정하는 독특한 요소를 찾아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우리가 제시한 지도에서 벗어났다고 두려워하지 말고, 여러분의 이야기에 맞춰 활용하면 된다. ... 트라우마는 캐릭터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 놀라울 정도로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트라우마의 원인이 된 사건들을 세심하게 연구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면서 캐릭터에 꼭 들어맞는 상처를 발견하여, 독자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인물을 만들기 바란다.” - 트라우마 사전 중에서


캐릭터를 연구하는 연기자들에게

이 책은 시나리오 작법 책이지만 캐릭터를 깊이 연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매우 실용적이고 유용한 책이다. 트라우마의 종류와 형성 과정, 캐릭터 성향에 미치는 영향 등을 꼼꼼히 분석해 입체적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을 상세히 보여준다. 이 책에서 다루는 트라우마는 100여 가지에 이른다. 각 트라우마마다 그 트라우마가 생기는 구체적 상황과 훼손당하는 욕구, 생길 수 있는 잘못된 믿음과 가질 수 있는 두려움, 가능한 반응과 결과, 형성될 수 있는 성격 특성, 상처가 악화할 수 있는 계기, 상처를 직면하고 극복할 기회 예시를 상세히 보여주어 연기자나 작가의 상상력에 뼈대를 만들어준다.
구체적 경험이나 이론적 토대 없이 막연한 상상만으로 트라우마를 캐릭터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으며 그 막연한 상상은 자칫 과장되고 전형적인 캐릭터로 흘러가기 쉽다. 깊이 없이 과장된 캐릭터, 전형적인 캐릭터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다. 한 인간이 경험하는 강렬한 사건, 그 사건이 인간의 복잡한 심리 실타래를 굴려 만드는 트라우마, 그 트라우마가 인간의 삶에 미치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영향 등이 섬세하게 표현되었을 때 비로소 독자나 관객은 공감하게 된다.
안젤라 애커만, 베카 푸글리시 지음 | 임상훈 옮김 | 윌북 |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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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에 대하여>
다니자키 준이치로

“그리고 세로로 퍼진 장지 문살의 한 칸마다 생긴 구석이, 마치 먼지가 묻은 것처럼, 영구히 종이에 착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의심이 든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 꿈같은 밝음을 의아해하며 눈을 깜박거린다.......여러분은 그러한 다다미방에 들어갔을 때에, 그 방에 떠돌아다니는 광선이 보통의 광선과 다른 듯한, 그것이 특히 고맙다는 느낌이 드는 엄숙한 것과 같은 기분이 든 적은 없었는가. 혹은 그 방에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되어 버리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세월이 흘러서, 나왔을 때는 백발의 노인이 되어 있지 않을까, 그 같은 유구悠久에 대한 일종의 두려운 마음을 품어 본 적은 없는가.” - 그늘에 대하여 중에서


깊고 고요한 사색이 필요한 이들에게

다니자키 준이치로 특유의 섬세하고 유려한 문체가 천천히 이어지는 책이다. ‘그늘’은 어둠과 다르다. 빛이 사물에 부딪혀 완전한 밝음도 완전한 어둠도 아닌 공간, 빛이 비껴가고 어둠이 완전히 덮지 않은 자리에서 펼쳐지는 작가의 느리고 예민한 사색이 천천히 흘러간다. 이 책은 작가가 그 공간을 응시한 책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그늘-원제목은 음예 陰翳 예찬-에는 그늘에 대하여, 게으름을 말한다, 연애와 색정, 손님을 싫어함, 여행, 뒷간 이렇게 여섯 개의 주제로 이어진다.
1886년에 태어나 1965년에 세상을 떠난 그가 그 시대 일본의 생활과 일본인의 삶, 일본의 건축물 곳곳에 드리운 그늘을 표현하는 방식은 한 장의 사진 같다. 정적으로 박제된 사물과 그 사물의 배경,프레임 밖에서 그 사물과 배경을 오래도록 응시했을 사진가의 모습과 작가의 모습이 겹친다. 100여 년 전 오래도록 그늘을 응시하며 사람을, 건물을, 빛을, 그림자를 바라보았던 한 작가의 고요한 사색은 언제 읽어도 우아하고 적요하다.
책 편집 디자인도 그늘의 느낌을 반영하듯 페이지의 2/3에만 글이 있고 하단에는 여백을 두어 그늘과 빛처럼 묘사했다. 이따금 각주가 창문처럼 여백에 배치되어 있다.
빛이 너무 눈부셨다면,
어둠이 너무 숨 막혔다면,
그늘에서 적요한 탐닉에 푹 빠져보길 바란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 고운기 옮김 | 눌와 |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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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여진

insta @didibydidi email didibydidi@gmail.com ——— 읽고 또 읽고 걷고 또 걷는다. 번역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다양한 책을 읽고 무수한 길을 걷는다. 책에서 만난 새로운 길을 이야기하고, 길에서 만난 새로운 사색을 글로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