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지 산책 에세이

상생에 관하여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 황지사>편의
실제 모티브가 된 구례 천은사

박여진 여행 작가, 백홍기 사진 작가

상생 相生: 둘 이상이 서로 북돋우며 잘 살아감.


가끔 이 단어에서 묘한 불편함을 느낄 때도 있다. 상생이라는 단어를 먼저 꺼낸 쪽이 다른 상대에게 기생하거나 해를 끼친 경우를 많이 봐서인지도 모른다. 물론 나의 좁고 기이한 편견이다. 어쩌면 유난히 이 단어가 오염된 상황을 자주 접해서 생긴 옹졸한 생각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 단어는 나의 편견보다 훨씬 너그러운 의미를 담고 있다. 필연적으로 공존해야 존재끼리 서로 유익하게 더불어 산다는 것은 어떤 관계에서든 이상적이니까.


구례 천은사에는 상생의 길이 있다. 이 상생의 길은 천은사를 가운데 두고 숲길과 호숫길로 이어진다. 천은사는 2022년 방영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에피소드 중 황지사 사건의 실제 모티브가 된 곳이다. 드라마에서 황지사가 사찰 앞 도로를 이용하는 모든 사람에게 문화재 관람료를 징수하면서 마찰이 빚어진다. 문화재 관람료 3000원을 되돌려 받겠다며 소송을 제기한 어느 노인의 주장과 문화재 보호법에 의거한 정당한 징수이므로 돌려줄 수 없다는 황지사 측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처음에는 문화재 보호법에 의거한 관람료 징수는 정당하다는 사찰의 입장이 우세했으나 도로는 공물에 해당하므로 관람료를 징수할 수 없다는 우영우 변호사의 변론이 원고 승소 판결을 이끌어 내며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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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한 내용은 다르지만 천은사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드라마를 보는 대다수 시청자가 사찰을 보지 않고 도로만 통과하는 모든 사람에게 관람료를 징수하는 사찰의 입장에 불쾌함을 느꼈을 테지만 사찰 측에서는 사찰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천은사 사유지에 국가가 도로를 낸 것이 그 발단이었다. 문화재 관람료는 사유지에 지방도로가 생기면서 여러 문제를 떠안게 된 사찰이 궁여지책으로 만든 제도였다. 이후 크고 작은 다툼이 있었으나 2019년 환경부, 문화재청, 전라남도 등 여러 기관이 협상에 나섰다. 전라남도가 도로가 포함된 땅을 매입하고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새 탐방로를 만들었다. 천은사도 관람료 징수를 폐지하면서 30년 넘게 이어지던 마찰은 해소되었다.


천은사는 신라 흥덕왕 3년에 덕운 스님이 창건한 고찰이다. 뒤로는 소나무 숲이, 앞으로는 호수 둘레길이 있다. 사찰 옆으로 청류 계곡이 흐르고 계곡 위로 아치형 돌다리가 우아하게 지나간다. 그 다리 위에 수홍루 정자가 단정히 놓였다. 숲은 수홍루 옆에서 시작된다. 이 숲은 ‘상생의 길’ 일부다. 그간의 복잡했던 속내를 담은 것인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상생’이라는 이름이 붙은 숲이 천은사 둘레로 아늑하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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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거대한 상생의 터다. 나무와 흙과 바위와 바람과 풀과 빛이 서로에게 생의 기운을 나눠주며 공존한다. 물론 숲에도 피식자와 죽음이 존재한다. 하지만 포괄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그 죽음마저도 숲의 일부가 되어 유구히 순환하며 배척과 추방도 상생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 경계를 넘어 숲을 훼손하고 생명의 숨을 앗아가는 건 대체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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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 나에게 천은사는 사찰과 숲과 호수를 모두 포괄하는 의미다. 천은사를 찾을 때면 일주문으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늘 상생의 숲을 한 바퀴 다 걸은 후 돌아서 들어간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단도직입적으로 만나는 사찰보다는 주변의 숲을 천천히 걸은 후 만나는 사찰이 더 깊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찰을 나와서도 곧장 돌아가지 않고 앞에 펼쳐진 호수, 천은제 둘레길을 걷곤 한다. 숲, 호수, 사찰 모두 개별적으로도 아름답지만 한 공간에서 저마다의 시간을 살아내며 공존하는 모습에는 개별적인 풍광이 가지지 못한 어떤 장엄함이 있다.


어느 해 3월, 천은사를 찾았을 때도 많은 것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겨울과 들어오는 봄. 해가 들지 않아 여전히 습하고 추운 응달과 흰색과 분홍색 매화를 활짝 터트린 양지의 사찰 마당. 가만히 하늘을 담은 호수와 호수를 내려다보는 하늘. 숲을 올라가는 사람과 내려가는 사람. 집으로 들어가는 개미와 집을 나오는 개미. 숲을 거의 다 내려오자 사찰 지붕을 수리하는 와공들이 보였다. 오래된 고찰의 지붕에 낡은 기와는 걷히고 새 기와가 얹어졌다. 그림 속 풍경처럼 정적으로만 보이던 사찰과 숲과 호수에는 상생과 공존을 위한 순환과 흐름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천은제 호수 둘레길을 걸으며 내 삶의 상생과 배척 혹은 공생과 기생을 생각했지만 대체로 그 경계가 흐릿하고 모호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삶의 일부를 공유한 백과의 관계는 상생이라 믿어 의심한 적 없지만, 삶의 면면을 쪼개어 본다면 그마저도 단언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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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상생 관계인가?”
늘 그렇듯, 나만의 생각에 빠져 나 혼자 이런저런 생각의 미로를 헤매다가 뜬금없는 질문을 백에게 던졌다.
“좋은 질문이야. 잘 생각해봐. 네가 집을 잔뜩 어지르면 그걸 누가 치우지? 네가 요리하면 누가 식재료를 다듬고, 설거지하고, 뒷정리하느라 손에 습진까지 생기지? 네가 빨래를 세탁기에 넣기만 하면 누가 그걸 꺼내서 널고 걷고 개고 서랍에 넣지? 아마 답이 쉽게 나올 거야.” 평소 말다툼에서 밀리던 백이 ‘상생’이라는 화두가 나오자 마치 고래를 본 우영우처럼 주르륵말을 쏟아냈다.
“아.....그렇구나.”
“그럼. 이제 알겠지?”
“응. 우린 완벽한 상생 관계네. 누군가 어지르면 누군가 치우고, 누군가 음식을 하면 누군가 정리하고, 누군가 빨래를 세탁기에 넣으면 누군가 걷어서 정리하니까 완벽한 상생이네.”
백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더니 피식 웃고는 다시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나무와 호수와 와공을 담느라 분주한 그의 카메라 셔터음이 천은사 구석구석 번졌다.


호숫가 둘레 길섶에는 쑥이 봄만큼이나 퍼져 있었다. 봄이 들어온 자리마다 겨울이 선선히 물러났다. 아직 겨울이 주춤대는 자리에는 봄이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 태어나는 것들과 이제 떠나는 것들이 무리 없이 순환하는 천은사 둘레로 3월이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구례 천은사는 tvN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13화, 14화에서 황지사 사건의 실제 모티브가 된 장소이다. 사찰을 감싸며 산책로가 이어지며 사찰 앞으로는 천은제 호수 둘레길이 있다. 어느 계절이든 걷기 좋은 아름다운 곳이다.
주소: 전남 구례군 광의면 노고단로 209
코스: 상생의 길 탐방로 (천은제 호수 둘레길과 소나무 숲길) 약 3.3km 약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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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여진

주중에는 주로 번역을 하고 주말과 휴일에는 산책 여행을 다닌다. 파주 ‘번역인’ 작업실에서 작업하면서 월간지에 여행 칼럼을 기고한다. 저서로 『토닥토닥, 숲길』, 『슬슬 거닐다』, 역서로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2』 외 수십 권이 있다.

사진. 백홍기

월간지 사진기자이자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회 ‘포토청’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사진디자인 석사 과정을 밟는 중이다. 저서로 『토닥토닥, 숲길』, 『슬슬 거닐다』가 있고 [아파트 연가]를 비롯해 다양한 작품 활동 및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