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지 ESSAY

어떤
무렵

박여진 여행 작가, 백홍기 사진 작가

작은 아치형 석문 옆으로 동백나무가 보였다. 동백꽃은 얼마 남지 않았다. 동백꽃은 지고 벚꽃이 필 무렵이었다. 윤기 없던 나무 끝에 연한 순이 맺히고, 둔덕에는 푸르고 어린 풀들이 올라올 무렵. 바다 냄새가 부드러워질 무렵. 봄이 익을 무렵이었다. 충청수영성에는 차고 긴 계절을 견딘 것들이 4월의 물기를 가득 머금은 채 느긋하게 풀어지고 있었다. 그 무렵의 둘레는 적당하고 따뜻했다.


‘무렵’은 ‘순간’보다 흐리고 순하다. 순간만 도려내어 보면 베일 듯이 예리한 시간들도 여러 겹으로 포개져 어느 ‘무렵’에 번지면 그럭저럭 견딜만한 시절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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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주민들이 게장을 만들어 파는 바닷가 마을 옹산의 시간들도 한 순간씩 도려내어 보면 무참하게 뒤틀려 있다. 홀로 자식을 키우며 술집을 운영하는 동백이, 그 주위를 촌스럽고 어정쩡하게 서성이는 용식이, 세상에서 가장 받고 싶은 것이 ‘존경’인 자존감 낮은 규태, 사랑에 끝도 없이 실망하고 분노하는 자영, 어린 딸을 버리고도 버리지 못한 채 살다가 병에 걸려 돌아온 정숙이, 호의와 무시 사이를 홀로 떠돌다가 홀로 죽은 향미, 끔찍한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마을. 낱낱이 도려내서 보면 지독하고 참혹하다. 슬픔과 고통이 관념이 아닌 실체로 떠도는 그곳을 느긋하게 견딜 수 있는 건 갈등과 사건은 종결되고 어떻게든 마무리 될 엔딩으로 구성된 드라마의 문법이 있기 때문이다. 해피엔딩이건 새드엔딩이건 드라마가 안착할 엔딩 즈음에는 거의 대부분 갈등도 희석되기 때문이다.



4월의 수영성은 느긋하게 반짝였다. 백과 나는 오천항 포구가 내려다보이는 성곽과 건너편 객사가 있는 언덕길을 걸었다. 봄이 따뜻하게 익고 있었고, 비 갠 하늘에는 두터운 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여기 정말 좋다. 이렇게 좋은 곳을 왜 진작 안 와봤지?”

“좋겠다. 넌 늘 새 길 걷는 기분이어서.”

“우리가 여기 왔었나?”

“기억 안나? 그 때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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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도 이곳에 왔었다. 기록적인 폭염이 쏟아지던 날. 지금처럼 부드럽고 어린 풀이 아니라 무성하고 질기게 자란 수풀들. 그 사이로 성가실 정도로 뛰어다니던 벌레들과 뜨거운 해를 피할 곳 없어 속절없이 뜨거워졌던 여름 무렵. 그 무렵 우리의 세계는 꽤 척박해서 충청도 바닷가로 여행을 왔다는 사실이 큰 위안으로 보상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늘 없는 성곽도 운치와 낭만이 있어야 했고, 시들하게 저물어버린 석양도 어떻게든 의미를 가져야 했다. 매 순간 실망을 감추며 억지로 의미를 부여했던 여행. 나는 좋은 봄날이 되어서야 그 때 대단치 않았던 의미들을 벗겨내고 그 여행이 덥고 시들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 때 나는 조각칼이 아니고 두부였나봐. 대단찮은 실망에도 와르르 뭉개졌던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드라마에 그런 대사가 나와.”

‘마음은 굳은살도 안 베기나. 맨날 맞아도 맨날 찌르르해요.
그 느낌이 막...두부를 조각칼로 퍽퍽 떠내는 그런 느낌이에요.’

‘그럼 동백씨도 두부하지 말고 조각칼 해요.’

백이 피식 웃었다.

“세상에 두부랑 조각칼만 있으면 살기 참 편하겠다.”

“그러게. 그렇게 단순한 질감만으로 살 수 있으면 편하겠다.”

두부와 조각칼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그 날도 석양은 신통치 않았다. 다시 먹구름이 덮인 하늘과 바다 너머로 해가 지는 둥 마는 둥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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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수영성에도 춥고 삼엄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1500년대 세워진 성은 바닷길로 들어오는 왜구와 해적을 수없이 버텼다. 누군가는 침략하고 누군가는 지키고,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어가던 이 성과 성곽 주변 사람들의 시절은 드라마보다 더 거칠고 모질었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에도 꽃은 피고, 해는 저물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닿지 않는 무언가에 애를 태웠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희붐한 새벽빛에 결연함을 다졌을지도 모른다. 그 무수한 순간들이 쌓이고 번지는 동안 성은 쓸모를 잃고 폐영되었다.
내가 그 시절에 살았다면 폐영된 성 이후를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백나무가 있는 성곽 돌계단에 드라마 주인공들이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시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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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충청수영성과 건너편 객사가 있는 언덕길을 걸으며 드라마 엔딩 이후 사람들의 삶을 상상했다. 애태우지 않아도 되는 사랑을 안전하게 누릴 동백이와 용식이, 야구선수가 된 필구가 겪게 될 부침과 좌절, 연쇄살인범 까불이가 네모난 감방의 크기로 살게 될 시간, 자식의 네모난 시간을 대신하지 못해 내내 가슴에 멍을 안고 살아갈 그 아버지의 시간. 살인범은 사라졌지만 크고 작은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날 바닷가 마을. 오늘을 어떤 무렵으로 회상하게 될 가까운 미래도 상상해보았다. 신통치 않은 석양과 두부와 조각칼은 잊히고 연한 연두색으로만 회상될 봄날의 수영성을.


보령충청수영성은 1509년에 축조되어 1896년 폐영되었다. 이후 성터가 복원되었고 2015년 영보정도 복원되었다. 드라마 <동백꽃이 필 무렵>의 촬영지였다.

에세이의 글과 사진은 PC해상도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글. 박여진

주중에는 주로 번역을 하고 주말과 휴일에는 산책 여행을 다닌다. 파주 ‘번역인’ 작업실에서 작업하면서 월간지에 여행 칼럼을 기고한다. 저서로 『토닥토닥, 숲길』, 『슬슬 거닐다』, 역서로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2』 외 수십 권이 있다.

사진. 백홍기

월간지 사진기자이자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회 ‘포토청’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사진디자인 석사 과정을 밟는 중이다. 저서로 『토닥토닥, 숲길』, 『슬슬 거닐다』가 있고 [아파트 연가]를 비롯해 다양한 작품 활동 및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