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의 서재는 탤런트, 성우, 코미디언 등 방송실연자의 다양한 감정과 영감, 창의력에 도움이 되는 양서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소설, 산문, 시, 인문학서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이 방송인 여러분에게 반짝이는 뮤즈가 되어 주길 기대합니다.



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우리는 마치 중요한 일을 수행하듯 우리 자신을 보존한다. 그러기 위해서 항상 다른 사람을 희생시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장해둔다. 남들이 실패하면 우리가 성공한 것이고, 남들이 바보 같으면 우리는 현명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을 부여잡고 나아간다.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을 때까지.”


인간 외연과 내면의 괴리를 탐구하고 싶은 이들에게

무수한 겹으로 되어 있는 인간 내면을 섬세하고 예민하게 들여다보는 작가 제임스 설터. 작가들의 작가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문장을 구사하는 그가 1975년도에 출간한 책이다. 70년대 미국 중산층 부부인 비리와 네드라의 화려하고 우아하지만 풍선처럼 공허한 삶을 천천히 그리고 낱낱이 들여다본다. 아름답고 사치스럽게 보이는 삶을 낱낱이 쪼개어 보면 무의미함, 공허함, 욕망 등이 먼지처럼 부유한다. 이들 부부가 유지하고 지탱하는 삶은 그 먼지보다 가볍고 허무하다. 서문을 쓴 리처드 포드의 말대로 ‘모든 것을 가지고도 불가피한 상실을 경험하는 미국 가족’의 삶은 50년이 지난 현대 사회에도 어색하지 않게 들어맞는다. 줄거리를 따라가기 보다는 한 문장 한 문장, 네드라와 비리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읽으면 그들의 삶에 좀 더 바짝 다가설 수 있다.
제임스 설터 지음 |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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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글쓰기
애니 딜러드

“단어들의 줄이 글 쓰는 이의 심장을 만진다. 그것은 대동맥에 침투해서 숨결의 물결을 타고 심장에 들어간 다음 두꺼운 판막의 꿈틀대는 가장자리를 누른다. 그것은 강한 말처럼 강한 거무스름한 근육을 만지면서 무엇인지도 모르는 뭔가를 슬퍼한다. 이상한 그림이 포낭에 싸인 벌레처럼 근육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어떤 흐릿한 감정, 어떤 잊힌 노래, 깜깜한 침실에서의 한 장면, 숲의 한 모퉁이, 끔찍한 식당 방, 그 활기찬 보도. 이런 파편들에 의미가 충만하다. 단어들의 줄이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내고 해부한다. ”


언어에 함축된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싶은 방송인에게

문장 한 줄이 나오려면 어떤 성찰과 사유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책. 비단 문장 뿐 아니라 대사 한 마디에도 여러 의미가 내포되곤 한다.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이지만 그 문장이 나온 과정을 역순으로 되짚다 보면 문장이나 대사에 내포된 의미를 파악하는데 무척 유용하다. 애니 딜라드는 지극히 사소한 순간 가령 자벌레가 꿈틀대는 순간이나 일식의 순간, 냇물이 흐르는 순간 등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시각 정보를 몸으로 불러와 감정으로 치환한다. 그렇게 치환된 감정은 다시 활자가 되어 문장으로 내보낸다.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소설이나 대본, 노랫말 등에 담긴 정서와 의미가 한층 세밀하게 보일 것이다. 아쉽게도 이 책을 절판되었다. 중고 도서를 찾아보거나 도서관을 이용하길 바란다.
애니 딜러드 지음 | 이미선 옮김 | 공존 | 2008년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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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김서령

“아픔은 사람을 사무치게 만든다. 그리고 사무침은 사람을 의연하게 만든다. 그래서 임하의 아이들은 열 살만 넘으면 대개 의젓해졌다. 그 의젓함은 특히 여자들이 더했다. 어른 중에도 간혹 자발없고 참을성 없는 이들이 있긴 했다. 누가 무슨 일에 울고 짜고 요란을 떨면 “쯔쯔! 생속이라 그렇지!”하며 바야흐로 속이 익어가는 과정을 가엾게 여겼다.”


오래된 허기를 달래고 싶은 이들에게

나는 호박이나 냉이, 배추적 등을 김서령보다 아름답게 표현하는 작가를 아직 보지 못했다. 편안하지만 깊고 부드럽지만 단단한 언어로 들여다보는 음식 에세이다. 안타깝게도 김서령 작가는 몇 해 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이 책은 우리 안에 있는 오래된 허기를 달래준다. 그의 책을 읽노라면 국수 가락처럼 술술 넘어가는 문장들이 차려 준 아름다운 밥상에 한 번 배가 고프고, 그 문장들이 데려가는 오래 전 어떤 시절의 향수에 또 한 번 배가 고파진다. 음식을 자주 접하는 방송을 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 쯤 꼭 읽어봤으면 하는 책이다.
김서령 지음 | 푸른역사 |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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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여진

insta @didibydidi email didibydidi@gmail.com ——— 읽고 또 읽고 걷고 또 걷는다. 번역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다양한 책을 읽고 무수한 길을 걷는다. 책에서 만난 새로운 길을 이야기하고, 길에서 만난 새로운 사색을 글로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