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나 자신으로 살고 싶은 보통사람의 이야기

KBS2 드라마 스페셜 <보통의 재화>와 공황장애

김진국 심리학자

KoBPRA WEBZINE WRITE.S vol.78 

어느 날 갑자기 심장이 벌떡벌떡 뛰고 숨이 막힐 것 같고 ‘이러다가 내가 죽는 거 아닐까?’ 하는 극도의 공포감이 들면서 눈앞이 캄캄해지고 심지어 졸도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그리고 언제 또 그런 일이 벌어질까 노심초사 전전긍긍한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연명하듯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일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공황장애(Panic Disorder)는 이제 일반인들에게도 낯선 병명이 아니다.

특히 연기자, 가수, 성우, 코미디언, 방송인 등 연예인 중에 공황장애로 고생하는 이들의 사연이 많이 알려지면서 ‘연예인 병’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우리가 잘 아는 가수 김장훈, 개그맨 이경규, 탤런트 이병헌, 만화가 기안84 등도 공개석상에서 공황장애의 어려움을 토로했을 정도다.

지난해 연말에 방영된 KBS2-TV <드라마 스페셜 제5화 - 보통의 재화>는 공황장애 판정을 받은 직장인 김재화(곽선영 분)의 이야기를 다룬다.

재화는 해피쇼핑몰이라는 회사에서 텔레마케터로 일하는 30대 여성이다. 직장 이름과 달리 그녀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

재화는 종일 전화 상담을 하며 각종 험한 말과 온갖 진상들의 짓거리를 감내해야 한다. 정해진 프로토콜 이외에는 함부로 응대하지도 못하고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지도 못하는 전형적인 감정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일상화된 재화의 스트레스는 연원이 깊다.
그녀는 날 때부터 ‘재수 없는 X’으로 찍혔다. 엄마가 재화를 낳을 때 오랜 진통 끝에 결국 제왕절개 수술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과다출혈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기 때문이다.

머피의 법칙처럼 공원을 산책하다가 껌을 밟기 일쑤다. 설상가상 그 발등에 개가 오줌을 싸기도 한다. 라면을 사와 한참 끓이는데 수프가 들어있지 않은 때도 있다.

재화는 반복되는 불운이 일상화된 자신을 ‘재수 없는 X’으로 자책하고 자조(自嘲)한다. 하지만 직장에서 감정노동을 하는 중에도 진상 고객이 ‘재수 없다!’는 소리를 하면 극도로 예민해지면서 핏대를 세운다.

그뿐만이 아니다. 재화가 출근하려고 회사 빌딩 현관문을 열면, 사람들이 제 문인 양 휙휙 지나가 버린다. 매번 상습적으로 얌체 같은 짓을 하는 남자 직원이 오늘도 얄밉게 싹 지나간다.

“또! 그 놈, 그 놈이야!”

재화는 저 깊숙한 곳에서 억눌린 분노와 억울함과 짜증이 치밀고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하고 숨이 막히는 듯하다가 졸도하기에 이른다. 재화에게 이런 발작은 처음이 아니다.

재화는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기 시작한다. “두 달 동안 세 번이나 발작이 일어났군요. 공황장애가 맞습니다! 약을 처방해 드릴게요!”

‘공황발작(Panic Attack)’이란 맥박이 빨리 뛰고, 손발이 떨리고, 오한이나 열감이 있거나, 현기증 등 전형적인 공황장애의 증상과 함께 곧 죽을 것 같은 공포감을 유발하는 심한 불안발작을 말한다.

문제는 환자는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감으로 몸서리를 치는데, 막상 응급실에 실려 가면 의사가 검사 소견상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공황발작은 대개 10분 이내에 증상이 최고조에 달했다가 20분~30분 정도 지나면 저절로 없어지기 때문이다.


“제가 공황장애라는 게 이해가 안 돼요.
평생 남을 배려하면서 살아왔어요.
남에게 싫은 소리 한번 한 적 없고,
피해를 준 적도 없어요?
대체 제가 이렇게 된 이유가 뭐죠?”

재화는 정신과 의사에게 하소연한다. 하지만 어쩌랴. 공황장애의 원인이 아직 의학적으로도 뚜렷하게 규명되지 못하고 있는 걸… 더구나 극 중 의사인 최병모(최대훈 분)는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만사가 귀찮다. 그냥 하루하루 대충 약물치료만으로 때우려 한다.

한편 재화는 아파트 쓰레기장에서 우연히 여중생 안희정(김나윤 분)을 만난다.

희정은 재화가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항의한다. 희정은 일진 여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해도,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사정을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않는 ‘애어른’이다.

재화와 유사한 성격이다.
희정은 재화의 어린 시절을 상징한다.

그들이 쓰레기장에서 처음 만난 것은 둘 다 사정이 그리 깔끔하지 못하고 쾨쾨하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 드라마는 공황장애라는 정신의학적 질병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내용이 지나치게 무겁거나 진지하지 않다. 오히려 밝고 경쾌하게 터치한다. 재화가 공황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앞에 주어진 ‘이중의 과제(dual task)’를 풀어야 한다.

하나는 자신이 당면한 현실적 장애이다.
다른 하나는 희정의 문제, 즉 과거의 자기와도 싸워 이겨야만 한다.

길거리에서 희정이 일진 여학생들에게 괴롭힘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재화는 희정을 구해주려 한다. 하지만 일진들은 “왜 쓸데없이 끼어드냐. 재수 없게!” 하면서 일축하려 든다. ‘재수 없다’라는 소리에 분노가 치민 재화는 울분을 못 이기고 반격을 하다가 발작을 일으켜 쓰러진다.

오늘도 약 처방을 하겠다고 나서는 의사 병모에게 재화가 털어놓는다.

“(일진 애들에게) 마음속 쌓인 말들을 털어놓는데 순간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내 안에 이런 면이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내친걸음이다. 물론 복약은 거부한다. 재화는 주문한 치킨을 문 앞에 조용히 두고 가라는 자신의 요구를 무시하고 늘 마구 벨을 눌러대는 배달원에게도 조목조목 따져 상황을 바로잡는다.

더 나아가 자신을 배신하고 자신의 절친과 바람이 나서 결혼까지 한 대학 시절 첫사랑 남성에게도 복수한다. 그리고 첫사랑과 결혼한 절친의 귀싸대기를 야무지게 쳐올리며 복수한다.

사실 재화는 두 사람의 불륜을 처음 목격했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따지지 못하고 자리를 회피했다. 이전의 재화의 성격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렇게 변화를 시작한 재화는 희정에게도 말한다.

“정의로운 일을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야.
진정한 용기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거야!”

사실 이 말은 재화가 희정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애들이 왜 괴롭히는 거니?”
“이유가 어딨어요?”

재화의 물음에 대한 희정의 답은 마치 공황장애가 반드시 특정한 인과관계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재화가 희정에게 또 말한다. “그런데 참지 마!” 이 역시 재화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하다.

재화의 변화가 이쯤에 이르자, 의사 병모에게도 변화가 생긴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무뎌진 일상에 대한 반성이다. 병모가 치료에 적극성을 띠기 시작한다.

“저와 마지막 상담 후에 첫사랑에게 복수도 하고, 그 후 사람도 만나고 했나요?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시도는 해봤나요?”

“아뇨.” 대개 공황발작을 처음 경험한 장소는 그 후에도 발작의 경험을 떠올려 쉽게 불안을 유발한다는 것을 의사인 병모가 알고 물은 것이다. 재화의 경우는 엘리베이터가 발작과 조건형성이 된 장소다.


“재화 씨가 고통받는 이유가 첫사랑 트라우마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런데 복수도 했고, 만족감도 느꼈는데 달라진 것은 별로 없네요. 오늘은 다른 얘기를 해볼까요? 부모님 얘기를 한번 해봐요.”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재화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상담실을 나가버린다. 재화의 경우, 과거 부모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고 이것이 문제의 핵심 단서 중의 하나일 것이라는 암시일 것이다.

아파트 현관에서 희정을 만난 재화가 묻는다. “애들이 괴롭히는 문제에 대해서 엄마하고 얘기해 봤어?” 희정이 반문한다. “엄마는 아세요? 아줌마가 엘리베이터 못 타시는 거?”

“희정아! 어른인 척 그만해.
벌써 남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어.
억지로 참지도 마.
내가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었어!”

사실 재화는 희정이 나이 때 아빠의 불륜을 발견하고 엄마한테 일렀던 적이 있다. 하지만 딸에게 남편의 불륜이 발각당했다는 당혹감에 어쩔 줄 모르는 엄마한테 오히려 강한 힐난만 받은 게 엄청난 트라우마였다.

“그냥 나만 알고 말 것을! 내가 참고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재화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더라면 엄마와의 관계도 어색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아빠와의 관계도 이렇게 틀어지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해왔다.

이 사건 이후로 재화는 무조건 참고 또 참으며 속으로만 끙끙 앓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의 희정이처럼 말이다. 재화가 첫사랑의 불륜에 눈감고 현장을 회피한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재화에게 무조건 약물치료만 고집하던 병모도 결심한다. 이제는 약을 먹겠다는 재화를 병모가 오히려 만류한다.

“약 처방을 당분간 중단할게요. 재화 씨가 맘껏 할 말도 하고, 뺨도 때리고, 타인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우리 같이 해봐요!”

재화도 받아온 약을 버리며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환자와 의사가 라포르(rapport), 즉 상호신뢰 관계를 형성하며 의기투합한 것이다. 재화의 앞날이 희망적일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복선이다.

한편 일진들에게 당하기만 하던 희정도 이제는 ‘참지 않고’ 강하게 반격한다. 이를 지켜보던 재화까지 합세해 일진들을 물리친다.

값진 공동의 승리이다. 상처뿐인 영광이지만 어쨌든 둘은 이제는 무조건 억누르기만 하던 ‘애어른’들이 아님을 몸소 체험했다. 예전의 재화, 예전의 희정이 아닌 새로운 재화, 새로운 희정으로 거듭난 것이다.

희정이 말한다.
“엘리베이터 한 번 타 봐요. 우선 딱 한 층만 해봐요!”

머뭇거리던 재화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천천히 따라 들어가고 문이 닫힌다. 희정과 재화는 두 손을 꼭 잡고 있다.
이렇게 재화의 이중과제는 무난히 해결되었다. 재화는 희정과 화해했을뿐더러, 부정하고 싶던 과거의 자신과도 화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재화가 병모에게 말한다.
“저번에 제게 물었죠? 마지막으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냐고? 이제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드라마 <보통의 재화>는 열린 결말이긴 하지만 해피엔딩을 예고하며 막을 내린다.
재화는 아파트 11층까지 걸어서 오르내리던, 보통이 아닌 현실을 극복할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유로이 왕래하는 재화의 모습은, 그녀가 ‘평범한 보통사람’으로서 미래로 나아가는 엘리베이터를 확보한 것을 상징한다.

사진출처: KBS

김진국

심리학자

심리학자, 문화평론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실, 예술의 전당 내 국립예술단체연합회, 고려대학교 인문예술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현재 융합심리학연구소장으로 있다. 학부에서 심리학과 의학을, 대학원 석사과정에서는 임상심리학·문화심리학 그리고 의학을, 박사과정에서 대체의학을 전공했다. 저서로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따뜻한 심리학』(202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