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_ 331p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책의 첫 장에서 만나는 가계도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가계도를 찾아보면서 인물들의 이름을 되뇌며 읽어야 할 만큼,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각자의 몫을 다해냅니다.

세상을 떠난 지 10주기. 생전에 제사를 거부해왔던 심시선을 위해 가족들이 기획하는 유쾌한 제사가 하와이에서 시작됩니다.

자손들은 자신의 할머니, 엄마이자 예술가였던 심시선을 추억하는 기념품들을 찾아 나섭니다. 자녀들은 하와이 곳곳을 여행하고 심시선의 삶의 궤적을 다시 돌아보면서 현재 자신들이 겪고 있는 상처와 아픔을 마주합니다.

가부장제 아래 예술가로서의 주체적 삶 대신, 유명한 예술가의 ‘그녀’라는 이름으로부터, 세계적인 예술가의 폭력으로부터, 세상의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살아남은 심시선의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인 상처를 안고 삶을 살아내야 하는 자손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힘이 됩니다.

유쾌함과 진중함을 넘나들며 저마다의 서사를 가진 매력적인 인물들과 제사상 차림에 동참하다 보면,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이 솟아오릅니다.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단단하게 살아갈 때, 그 힘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응원의 손길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 누군가의 뿌리로부터 뻗어 나온 나, 혹은 누군가의 뿌리가 될 나로부터 시작될 이야기들을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요? _ 문학동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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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른 생각 그만하고 처음부터 다시 걷자. 지금 이렇게 멋지게 해가 저무는데, 지금, 이 순간을 보지 못하면 다음에 이곳을 떠올렸을 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거야. _ 184p
슬슬 거닐다
박여진, 백홍기

시간이 부족하다는, 주변에 걸을 곳이 없다는 핑계를 차곡차곡 쌓아나갈 무렵 이 책을 만났습니다. 소나무 숲길로, 삶이 묻어나는 항구로, 수많은 이들이 스쳐 갔을 돌담길로, 늪과 습지대로, 눈 덮인 산사의 길로 걸음을 이끄는 책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걷는 순간들에 마음을 쏟는 저자는, 눈으로 본 자연을 고스란히 담아냅니다. 번역가인 저자의 섬세한 표현에다 길가의 이름 모를 꽃과 나무, 길을 오갔던 사람들을 기억하는 따뜻한 마음이 글 한줄 한줄 마다 살아 있습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작가의 발걸음을 따라 여러 계절의 길을 천천히 걷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걷기의 매력에 빠진 저자가 소개하는 34곳의 숨은 산책로는, 그녀의 오랜 동행이자 사진가인 ‘백’의 풍경 사진이 더해져 숨을 쉽니다.

책의 마지막에 다다들 무렵, 이쯤 되면 궁금해집니다. 걷고 싶게 만든 코스를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지죠. 마지막 장에 보물을 내어주듯 저자는 34곳의 산책길 코스를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육체적 에너지보다 정신적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을 오늘, 코로나로 더해진 일상의 답답함을 벗고 싶다면 잠시만 걸어보는 건 어떨까요. 그도 어렵다면 소란함을 벗어나서 뚜벅뚜벅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는 건 어떨까 합니다. 느리게 걸어가며 자신을 만나는 여정을 함께할 수 있을 것입니다. _마음의 숲,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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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너무나 다른 만큼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서로에 관해 대화와 경험이 부족할 때 이해의 과정은 더욱 험난해진다.
마치 내가 경험과 고민이 부족했기 때문에 흑인의 피부색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따라서 우리는 같이 살기 위해서 더 시끄럽게 서로의 차이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하기 위해서 더 요란하게 서로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_ 27p
태도가 작품이 될 때
박보나

‘현대예술’ 하면 어렵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전문 지식을 갖고 정답을 찾아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더해지면 감상은 더 어려워집니다.

영상과 퍼포먼스 등으로 다양한 예술 활동을 펼치는 박보나 작가는 현대예술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소개합니다. 예술적 지식과 작품의 해석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작가가 어떤 의도를 갖고, 왜 그렇게 작품으로 표현했는지에 집중하며 작가의 ‘태도’를 주목합니다.

이 책에서는 기존의 관습을 거부하고 자유롭고 비판적인 태도로 작업한 현대 예술가 17명의 작품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류 예술에서 밀려난 비주류가 아니라, 어쩌면 ‘세상과 예술을 비껴보는 태도’를 가진 예술의 새로운 중심일 수도 있겠습니다.

가부장제 하의 여성, 성 소수자,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작품들의 세계는, 철학 인문 사회영역을 넘나드는 박보나 작가의 시선을 거쳐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오고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는 더욱더 또렷하게 느껴집니다.

태도는 많은 것을 결정합니다. 세상을 마주하는 우리의 태도가 하나의 작품이자 예술이 될 수도 있겠죠.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엔 우리가 어떤 삶을 어떤 자세로 살아갈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합니다. _ 바다출판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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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술자리에서 황소윤이 내게 물었다. 창작자에게 특히 필요한 자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고.
나는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를 견디면서 계속하는 힘이라고 대답했다.
언제나 맘에 쏙 드는 것만을 내놓는 창작자도 어딘가에 있겠지만 나는 그런 창작자가 아니다.

나랑 비슷한 창작자라면 지나친 엄격함에 짓눌리지 않도록 애쓰며 무언가를 만들고 있을 듯하다. 스스로를 다그치다가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곤 한다.
반복하면 더 잘하게 된다고 격려하며 자신을 너그럽게 다룬다.

이 책의 창작자들에게서도 그런 마음의 균형을 본다. 우리는 아마도 이 짓을 오래 할 것이다. 오래 하는 동안 어떤 식으로든 달라질 것이다. _ 397p
창작과 농담
이슬아
농담이 진담 못지않을 때가 있습니다.
농담 삼아, 재미 삼아 해본 것들이 명작이 되기도 하죠. 정제된 표현이나 엄격한 논리에 비켜 있는 공간에서 창작이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창작과 농담>은 작가이자 음악가로 활동 중인 이슬아 작가가 여섯 명의 동료 예술가들과의 대화를 묶은 인터뷰집입니다. 농담과 고민의 틈 사이에서 나오는 반짝이는 창작물의 탄생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밴드 새소년의 황소윤,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의 저자 김규진, 말하듯 노래하는 음악가 장기하,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배우 강말금과 영화감독 김초희, 밴드 혁오의 오혁.

여섯 명의 예술가들은 무대 위 희열, 창작의 기쁨 외에도 때로는 밀려오는 부끄러움을 안고 감내하면서 무언가를 꾸준히 해나가는 창작자의 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인터뷰를 위한 인터뷰라기보다는, 동료 예술가의 창작 활동을 궁금해하는 작가의 사심 가득한 대화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진솔하게 오가는 대화의 화학작용으로 대화의 색채는 짙어지고, 이미 알던 예술가에게는 새로운 면을, 몰랐던 예술가에게는 그의 창작물을 찾아보고 싶어지게 합니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어느새 이들의 팬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모르지요. 여러분의 농담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게 될 지도요._헤엄출판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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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만지

@manji_library book reviewer

책 읽기, 독서 모임, 글쓰기, 책 나눔, 필사를 좋아하는 북 리뷰어.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기차를 타고 가는 출퇴근길에는 책을 읽는다. 주말에는 종종 독립서점 '살롱드 북'에서 책방지기를 하고 있다.

살롱드 북 @salon_book ——— 관악구 봉천동 작은 골목에 위치한 독립서점. 낭독회, 독서모임, 글쓰기 클래스 등 인문학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salon’의 어원처럼 문화적 소통의 공간을 지향한다. 심야까지 운영하여 맥주, 와인, 위스키 등 술 한잔과 함께 머물수있는 동네 책방이다.